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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일 : 2015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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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오류의 집합체 성경 2권-1(신이 되는 길!)
글쓴이 : 종교탈출  (124.♡.67.237) 날짜 : 2019-04-19 (금) 12:00 조회 : 520 추천 : 0 비추천 : 0

모순과 오류의 집합체 성경 2(신이 되어라!) 

 

 

들어가는 말(신이 되는 길)    출처:http://cafe.daum.net/one-god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말과도 동일하다. 너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현인 소크라테스는 모른다고 답하므로 동양적 사후세계관에 어울리는 답을 했고 데카르트역시도 모른다고 답하는 것을 나는 생각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면서 존재의 근거에 대해서 답하였다. 현자 둘 다 아주 명확하고도 분명한 것에 대해서만 답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라는 것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였고 이 말인즉 육체는 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전부다가 후천적으로 경험되고 습득되어진 것들로서 이러한 것들은 언제 또 다시 변형되어 질 수 있는 것이고 어떠한 경험적인 것들에 대한 기억들조차도 변형되거나 잊혀 질 수 있고 새로 취득되어질 것들에 불과한 가변적인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원천적 나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그러한 가변적인 것으로는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의미는 나라는 존재는 존재로서 입증될 수도 없고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로서의 설명조차도 불가한 성질의 것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답변으로 돌아 가보자. 우선 나가 누구인지 정의하려면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먼저 설명이 가능해야한다. 하지만 이미 설명 한 바처럼 나라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답하므로 나라는 것을 육체에 한정하지 않고 답을 한다. 즉 어떠한 물질적 형상을 갖추든 아니면 어떠한 죽음 이후의 삶이 있든 없든 생각 즉 의식의 존재여부에 따라 나의 존재여부가 있다고 한 것이다. 즉 다시 말해 둘 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든 우리의 육체를 나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라는 존재는 육체외의 다른 증명 불가한 그러므로 답하는 것이 불가한 존재로 보았고 데카르트는 모든 존재하는 생명체의 공통점인 비물질적 사고체인 의식이라는 것을 통하여 그 실체를 입증하려고 하였다. 의식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시 하므로 가능하다 할 것이며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자체를 증거 하지 못할 경우에는 데카르트처럼 연역적 방법에 의하여 입증가능 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비과학적이거나 비 실체적인 현상들이나 기적들 즉 세상에 일어나는 각종 초현실적인 것들의 발생을 통하여 물질체 이상의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음을 역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에는 이러한 초월적 현상이나 기적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사실 이 세상에는 초월적 현상들에 대해서 너무도 많은 사례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하여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으며 상당부분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입증되고 설명되어져왔다. 하지만 기적은 단순히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성경에 소개된 각종 이적들은 단순히 뇌의 작용으로 일어난 현상으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하다. 임사체험에서의 사후세계 체험도 지금은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심장박동이 멈추어도 일정시간 뇌에서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체험 또한 그로인한 현상으로 설명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예전에는 설명이 불가하던 현상들을 설명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밝혀지면 그것이 과학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의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의식, 잠재의식 그리고 무의식으로 크게 나누어 설명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에 의한 설명도 전부 뇌 작용의 일환으로 설명가능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 집단의식이다. 단체로 하는 기도라든지 인류평화를 위하여 전 세계적으로 동일 시간대를 정하여 명상과 소원을 비는 이러한 의식의 집중행위를 통하여 사건 사고나 범죄의 축소 등의 통계를 내는 방식으로 집단의식이 존재함에 대한 통계가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단순히 뇌 작용으로 설명되든 현상들을 초월적 현상으로 설명하는 시도들이 범람하고 있다. 즉 뇌는 단순히 수신기 역할을 할 뿐이고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집단의식과 같은 의식 작용을 영적 분야의 현상 및 실체로서 접근하고 해석하고 설명한다. 신비 현상으로는 무지개 몸을 예로들 수 있다. 빛 몸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도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화산에서 빛의 몸으로 변한상태에서 나타난다. 또한 부활 후 사람들 앞에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티벳 불교에서도 많은 수도승들이 이미 무지개 몸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많은 수도승들이 수련하고 있다.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의 일부라 할 것이다. 이미 1권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송과체 관련한 말들이다. 차크라 관련한 것들이다. 우리나라의 단전호흡도 같은 것이고 명상수련이나 금강경 수련의 양신 잉태 그리고 성경에도 등장하는 불수례 즉 머카바, 그리고 어린아이, 복부에서 샘솟는 생명수, 야곱의 천국 계단, 빛 몸과 눈, 일곱 봉인, 천국열쇠 등이다. 이러한 단어들과 관련하여 정신적 육체적 수련을 통하여 신비의 세계를 사후가 아닌 현세에서 체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세계를 직접 체험하므로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 세상 외에 초월적 세계가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약 과학이 이러한 초월적 현상에 대해서 설명 가능한 날이 온다면 누구나 신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말세에는 많은 자들이 스스로 변화할 것이라고 예언까지 되어있다는 사실 아는가! 그리고 의식의 작용으로 최면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최면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암시에 의하여 전혀 다른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인격이란 악의적이라든지 선이라든지 윤리적 측면을 말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을 뜻한다. 어떠한 기능적 측면이나 성격적 측면에서 소극적이거나 적극적 이런 식으로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선수들이 시합에 들어가기 전에 명상 훈련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최면에 해당한다. 단순히 훈련과정을 명상하는 것만으로도 근육의 발달과 기술의 숙련이 있음은 이미 정설이 된 현실이다. 그리고 소위 워크인이라는 현상과도 실상은 유사한 현상이다. 성경에도 이에 대한 기술이 있다. 즉 성령에 대한 기술이다. 실상은 자신이 하는 것으로 알아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다시 말해 어떠한 영감이 떠오르고 어떠한 해야 할 말들이 생각나고 어떠한 아이디어가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갑자기 오싹할 정도로 어떠한 직감이 스치고 이러한 현상들이 단순히 뇌가 알아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출생도 이러한 것에 한몫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가시적 세상 외에 본질적 차원의 세상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우리는 좀 더 이 현실세계의 모순에 관용하고 넓고도 풍요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막는 존재가 있다. 바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들이다. 이들은 우상을 내세워 진리를 가로막고 인류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지옥교리를 만들어 진리와 혼합하므로 인류를 계속해서 무지의 어둠속에 가두어 두고 있다.

 

신으로 가는 길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신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가 아니다. 무수히 많다. 하지만 한 가지 고수해야할 원칙이 있다. 어느 길을 따라 갈지는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각자가 처한 현실에 따라 각자가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지만 원칙은 지켜야 한다. 이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이원론적 사고이다. 예수께서 정죄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원론적 사고는 무조건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어 있다. 무조건 좌우로 나뉘게 되어 있다. 좌우 뇌 사고방식도 그러하다. 음과 양, 빛과 어둠, 선과 악, 옳고 그름, 천국과 지옥, 생과 사, 풍요와 빈곤, 이 물질세상은 전부가 이원론적 세상이다. 중도와 중용을 논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맞지 않다. 특히 정치에서는 중도란 갈 곳 없는 자들의 임시 거처 일 뿐이다. 이원론적 세상에서는 항상 정죄가 일어난다. 항상 분노가 함께 한다. 그런데 평화나 안식이나 공감은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 함께하고 있는 부분에서만 일어난다. 공감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그 이유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앎이 존재하고 있다. 즉 이러이러한 이유로 공감할 수 없다는 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좌이고 이것은 우이다.”라는 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라고 판단하게 하는 앎이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른다고 답했다. 무지로 인한 무지를 표한 것이 아니라 앎으로 인한 무를 표한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일상적인 물질적 존재에서 벗어난 실질적 존재로의 접근을 통한 의식이라는 것으로 실체를 찾고자 하였다. 그 실체가 신이다. 이 물질세상에서 지금까지 입증하거나 논거하기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던 존재이다. 즉 영원불멸성을 지닌 존재를 말함이다. 신이 된다는 것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원래 영원불멸의 존재이라면 굳이 될 필요조차도 없게 된다. 즉 다시 말해 신이 된다는 의미는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자각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인간이 바로 신이라는 인식의 회복이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신처럼 생각하고 신처럼 말하고 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실체는 신이면서도 신이 아닌 짐승이 되는 것과도 같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론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총기가 떠나자 들짐승과 같이 살면서 소와같이 풀을 뜯고 그 형상도 짐승처럼 머리와 손톱이 길어져 변하였다. 그리고 수년 후 총기가 다시 돌아오자 그 위치를 다시 찾았다. 즉 인간의 육체를 보고 인간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어도 인간처럼 살아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이 짐승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신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신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신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인간의 속성인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상에서 육체는 머물고 있어도 그 생각과 마음과 행동은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육체가 신이라고해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도 따라온다는 것이다. 신 의식을 회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 의식은 많은 깊은 형이상학적 의미들을 부여하고 논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그 길 또한 수없이 많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여러 다양한 나타남의 양상과 형태 중에서 한 가지 필수적인 것이 이원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지에 의한 무지의 표현이 아니라 이원론적 사고 즉 이원론적 세상에 대한 많은 고찰과 이해를 통하여 이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초월한다는 것은 이원론적 세상에 대하여 멀리하고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해 있어도 벗어나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원론에 빠져들 때 마다 각 개별적 사건으로 하나씩 별건으로 이원론적 사고 및 마음에 일어나는 심상들에 대해서 앎이라는 도구를 개별적으로 사용함으로 벗어나는 습관을 키우는 것이 그 방법이다. 즉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짐승으로 살아오고 이에 길 드려진 의식의 계속성 즉 습관을 신이라는 인간의 습관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냥 무언가를 부지불식간에 하더라도 신 인간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습관화된 것을 우리가 단순히 앎이라는 것만을 통해서는 이것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원론적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앎이 뿌리내려야한다. 믿음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스스로 신이 된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면요법이다. 최면요법은 믿으면 믿을수록 그 효력이 배가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신이라는 아주 깊은 최면에 들어 갈 수 있다. 그 믿음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확률적으로 용이한 것부터 그리고 시행하면 가능한 것부터 실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이 바로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변화시키는 것보다 세상을 지적하고 변화시키는 것 보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용이한 방법이 된다. 여기에는 앎을 통한 자기부정이라는 방편을 사용해야한다. 그래서 신이라는 신분에서 인간이라는 신분으로 이 땅에 와 있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신이란 존재는 처음부터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본체로서는 전부가 일체이다. 일체가 분리되어 무수한 역을 나누어서 체득함을 통해 얻어진 모든 지식이 일체로서 획득되어지고 체험되어지도록 분리착각체로 이 땅에 온 것이다. 즉 신은 하나이고 지식도 하나이고 만유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획득된 체험도 모자람이나 지나침이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할 만큼 그리고 성장되고 유지될 만큼 필요이하도 이상도 아닌 그 만큼인 것이다. 즉 완벽함이라는 뜻이다. 무일 때는 무에 해당하는 만큼이다. 모든 것이 합하면 무이다. 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함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분리됨이다. 존재하는 가시적인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변하는 것은 다시 본체로 회귀함이다. 이 때 새롭게 획득되어지고 창조되어지는 것이 바로 정보이다. 이때 정보란 기계처럼 어떤 물리적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유는 정보저장소가 바로 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라는 것은 존재의 개념이 아니다. 최초의 무라는 것은 존재 가능성이었다. 이 가능성이라는 것은 물질적 개념이 아니다. 존재가능성이라는 비 물질체가 어떠한 이론이나 법칙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 가능성이라는 개념만으로 존재하였을 뿐이므로 증명이나 입증을 요하지 않는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능성 자체는 전지하지도 않았고 전능하지도 않았다. 전혀 어떠한 성질이나 속성자체를 부여할 수 없는 순전한 가능성인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 기인한 현존하는 모든 것은 그만큼의 의식을 소유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가능성이란 자체가 제한이 없다. 퇴보할 가능성 답보할 가능성 진보할 가능성 확장할 가능성 모든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 지구라는 땅에 속해 있는 물질체로서의 착각분리체인 우리는 완벽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이 물질 세상에서 진보든 퇴보든 답보든 그 방향을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의도적 분리착각체인 인간은 가상현실의 게임과도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게임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고 다시 하지 않으면 되지만 그리고 언제든지 맘에 드는 게임으로 다시 하면 되지만 실체세상은 선택사양이 아니라 필수 코스라는 점이 다르다. 그 코스를 마치기까지는 더 나아갈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더 나은 게임을 선택해서 하려고 해도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 자체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그 자체가 실은 낮은 차원의 단계에서 지금 여기로 왔다는 뜻이다. 인간들에서도 수준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이 그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차원의 것이든 값있고 귀중한 것으로 악역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있으며 성장할 것이 있다. 최종적으로는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신의 길로 나아갈 뿐이다. 모두가 선일수도 없고 모두가 악일수도 없다. 인과의 법칙이 그렇게 되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누군가는 신의 길로 나아갈 것이지만 아직 그 길을 가기 싫은 영혼들은 더 겪어야 할 것에 머물게 될 것이고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방법은 말로는 표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최고의 방법을 찾아 그 길을 걷게 되는 영혼은 그렇게 되기까지의 길을 이미 걸어왔기 때문에 그 길을 걷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많은 지체가 있을 것이고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래서 신의 길을 예수는 알려주고 가르쳐주고 보여주었다. 당당하게 자신이 신이라고 선포하였다.

 

예수는 신 의식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사랑을 가르쳤다. 그렇다. 신이 되는 길은 사랑의 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사랑만을 가르치진 않았다. 신의식인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정죄하지 않는 것이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며 좌우로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 법칙은 아주 놀라운 위력을 급속히 발휘하는 능력이 있다. 서서히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즉시 바로 나타난다. 모든 인류가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이 법칙을 너무도 등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초월의 법칙이다. 아주 신비한 능력이다. 이 초월의 법칙이 잠재의식에 까지도 미치게 되면 신적 능력이 이 물질세상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고도로 특화되거나 특정부분에 고도의 집중화를 통한 신비적 체험 등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실상은 이러한 신비적 체험은 신성회복을 위하여 나아가는 길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도록 도우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어떠한 신비적 체험이 없어도 신성회복이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목적달성인 것이다. 신비적 체험을 목적으로 하면 모두 다 실패한다. 차라리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실체에 대한 자각을 지니고 이 물질세상을 잘 견뎌 나가는 것이 오히려 유익할 것이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원성에 빠진 우리는 원수 맺는 것으로 삶을 살아간다. 즉 경쟁사회이다. 이러한 생존경쟁을 필수적 요소로 하고 있는 물질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신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것이 숙제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는 것조차도 하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이자들이 무익하고 불필요한 존재들이 아니다. 반대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이다. 각양각색의 필요존재가 있으므로 이 세상은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학습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할 뿐이고 한번 맡은 역이라고 해서 평생을 한 역으로만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필요한 만큼의 시간만큼만 그 역을 할 뿐이고 그 역을 하는 자는 실은 이 육체라는 물질체가 아닌 본체이다. 다만 제한적 분리 착각체인 이 육체를 통하여 제한된 만큼만 그 능력을 발휘할 뿐이다. 다시 말해 온전한 뇌의 경우는 일체인 본체와 완전한 일체를 이룰 수 있지만 일체인 본체와 분리된 착각체는 체험적 정보를 일체인 본체에 전달하는 역할을 통하여 그 만큼의 진보를 하고 또한 일체인 본체 역시도 그만큼의 진보를 하는 것일 뿐이다. 영원불변의 운영법칙인 인과의 법칙도 진보된 정보만큼 그만큼 완벽하고 하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될 뿐이다. 우리는 이 인과의 법칙을 넘어서는 방법이 하나있다. 실은 이 역시도 인과의 법칙에 적용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 인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비로 이것이 카르마를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 일수도 있다. 인을 만들지 않는 것에는 과도 따르지 않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므로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에 적용된다고도 할 것이다.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앎을 통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직장생활에서든 가정에서든 어디에서든 적용 가능한 법칙이며 그 효능이 아주 뛰어나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려하면 항상 이원성에 빠진 습관이라는 것이 나타나서 방해를 한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리고 포기한다. 이에 한 가지 실천적 장기 방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원성에서 벗어나기 쉬운 환경 조성을 먼저 하라는 것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먼저 물질이다. 수많은 자들이 신의 길을 걷고자 하기 보다는 물질우선으로 삶을 영위하고 끝마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기 정체성도 모르는 체 생의 마지막 즈음에 허망함만을 지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신성회복을 하고자하는 이들은 실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이원성에서 벗어난 앎을 통한 무로 돌아가는 길을 걸으면 오히려 엄청난 평안과 위로와 믿음들이 생겨난다. 실패해도 습관을 들이기 위한 방편이므로 절대 부담 갖지 말고 당연한 사항으로 알고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좋다. 세상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자들은 오히려 이를 부정하지 말고 최소한 세상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체험해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것에 빠지면 그 만큼 고통도 따른다는 인과의 법칙을 기억해야한다. 최소한의 비용을 드려 최대의 효과를 내는 수준에서 빠져보라는 것이다. 금욕하지 말고 즐기고 체험도 해보되 즐기게 되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결혼도 그렇고 자식을 보는 것도 그렇다. 이런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신성회복에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나마 연금제도가 있어서 상당한 도움이 된다. 젊은 시절에는 욕망에 대한 체험을 위주로 빨리하고 벗어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을 가지고 이를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여건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당장에 먹고사는 것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신성회복을 위한 길을 걷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한 세속적 욕구에서 벗어나는 만큼의 진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부를 소유한 자들은 그 물질을 보존하기 위하여 매진하다가 대부분은 생을 마감한다. 젊은 시절부터 신성회복을 위하여 계획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엄청난 진전을 이루고 이 물질세상에서도 더할 나위없는 천국을 누릴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면 오래간다. 그리고 큰 적이 없다. 그리고 실수가 없다. 그리고 안정적이다. 앎을 가지되 그 앎은 이원성을 벗어나는 용도로만 사용하여야 한다. 그 앎을 통하여 세상에 적용하지 말라. 그 앎은 자신이 행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만 적용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나타내지도 말라. 아는 척도 말고 나서지도 말라. 세상은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오직 앎은 행동함에만 필요한 경우 행하므로 적용하라. 누군가가 나의 공로를 가로채도 내버려두라. 누군가가 나의 앎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지 못하도록 나의 앎이라는 것 자체를 표하지 말라. 나의 행함을 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로 돌아가라. 인간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지도 않는 사항에 대해서도 항상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판단하고 정죄한다. 성경에도 예수께서 말하기를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자도 있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다고 하면서 할 수 있다면 혼자 살아라!”고 했고 기독교창시자인 바울은 한 발 더 나아가 설사 결혼을 하였더라도 혼자인 것처럼 사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또 성경에 예면 예 아니면 아니다.”라고만 답하고 더 나아가 보태는 말은 죄라고 했다. 뭔가를 계획하고 설명하고 누군가를 설득해야하는 그런 자리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위치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자리는 그런 욕망을 가진 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다. 자기만의 전문기술을 가지는 직업이 가장 좋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위하여 혼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나 잘난 것을, 나 많이 아는 것을 나타내는 것보다는 신성회복을 위한 환경조성이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나만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지닌 자들은 그만큼 이원론적 세상에서 벗어나기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영성회복을 위하여 수련하는 별도의 자리를 찾고 심지어는 종교에 귀의하여 세상과는 등을 지는 것이다. 세상과 등을 진다는 자체가 세속적 욕망을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특히 남자의 경우는 욕정이 가장 제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독신에 대해 성경에서 언급 한 것이다. 또한 단순 노동을 요하는 직도 너무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역으로 농촌이나 산중에서 자급자족하면서 단순 노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도 신성을 회복하는 길을 걷는 조건으로는 아주 적합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올바른 신성회복의 길은 세상 속에서 앎을 통한 무로 돌아가는 훈련이 유효하다할 것이다. 여기서 의무적인 어떠한 직장 같은 일거리를 통하지 않고도 세상과 교통하면서 신성회복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최대한 이러한 여건 조성을 미리 계획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젊을 때 나름 노후 준비도 하고 직장에서 벗어나도 세상에 빠져 세상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어떤 지식보다도 신의 길을 가는 지식을 체득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다. 이를 위해 건강도 챙기고 가족도 챙기고 주변도 챙기는 것이다.

 

평소 자기 자신으로 알고 있던 육체 이것은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이 육체를 잘 가꾸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히 영양을 잘 공급해준다는 차원을 넘어선 강건한 체력을 말한다. 그리고 이 육체는 외모의 잘남을 뜻하진 않는다. 건강함을 뜻한다. 인간들은 자신의 외모에 아주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항이다. 자신을 나타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 도구를 통하여 자신을 실현해 나가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육체라는 도구를 자기 자신으로 믿고 이 육체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외모지상주의와 물질우선주의를 불러왔다. 이는 역시 참 자신에 대한 망각을 더욱 더 부채질하여 아무리 진리가 가까이 있어도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게 만들었다. 오직 육신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짐승의 삶을 살아가게 했다. 그러므로 진리탐구와 실현의 도구가 역으로 쾌락추구의 주체가 되어서 온갖 사회적 악을 부추기는 주체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육체라는 도구는 양면성을 띈 존재로서 어떠한 측면으로 사용되어지든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누가 되었던 그러한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자가 있었기에 또한 지금 진리의 길을 나서게 된 자들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차이가 크다. 모르고 있는 자는 계속해서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이번 삶에서 알지 못하면 다음 삶에서 다시 반복해서 저지른다. 그리고 육신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위에는 필히 그 대가인 고통이 따른다. 육신의 감각적 만족을 위한 행위의 절제에도 그 보상이 따르게 되어있다. 바로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신비한 체험이 주어진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얻을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고양된 의식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즉 일체로부터의 원조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한다고 한다. 절대 아니다. 이는 종교라는 것이 개입되어 진리가 변형된 거짓 가르침이다. 죄라는 것은 이를 회개한다고 해서 사라지고 깨끗하게 되는 성질이 아니다. 죄라는 것은 죄라는 개념이 부여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때 비로써 사라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뉘우쳐도 이원성의 세계에 갇혀있는 한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음으로 품는 것도 죄라고 한 것이다. 죄라는 것은 이 이원성의 세상에 대하여 초월할 때 그 때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원성의 세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자각이 따라야 하고 또한 그러므로 인하여 육체는 자신의 도구이지 자신의 섬기는 상전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여야 한다. 즉 육체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자신은 육체의 주인이지 육체를 섬기는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원성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가 육체를 상전으로 섬기면서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참 자신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은 육체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서 주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육체와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지배하고 있어서 육체가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지는 것으로 믿는 믿음이 자연 이 이원성의 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육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방법으로 종교가 나타난다. 그리고 현자들도 나타난다. 종교는 집단으로 활동하고 다수로 활동하나 현자는 홀로 있다. 현자는 단체로 있어도 항상 혼자이다. 종교는 제물을 먹이로 생육하지만 현자는 진리만으로 살아간다. 종교는 현자를 이용하여 제물을 축적한다. 종교는 극도의 이기심을 그 바탕에 두고 있으므로 공존을 거부한다. 극도의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배타성을 지닌 종교일수록 거짓되고 과장되고 꾸며지고 허망하다. 속성상 배타적인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란 어디에나 적용되어지고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무한의 법이다. 이 법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생존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절대 배타적인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그 모든 존재하는 것이 그 진리 안에 녹아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이 진리이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것이 스스로 나는 거짓이다.”고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 된다. 인간들의 물리학에서도 모든 것을 설명하는 물리법칙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을 추구하는 종교에서 배타적이라는 것은 초등학교 수준보다도 못한 영성이라고 스스로 세상에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도록 가르쳤다. 즉 초월의 가르침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수용하는 진리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이원성이라는 세상에 한해서 말할 때 그렇다. 원수를 사랑하는 수용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초월성을 익혀야 한다. 육체는 섬겨야 하는 주인이 아닌 도구로 사용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육체의 동물적 감각의 만족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야하지만 이는 단순히 깨닫는 것으로 실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라는 공포와 협박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스스로 체득되어져야 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것을 견딜만한 자만 받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육체적 감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것들의 부질없음과 허망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받을 만한 자만 받으라고 한 것이 바로 허용한 것이다. 이는 불가피함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깨닫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역으로 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따른 고통도 감내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고통은 피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하도록 존재하는 것이다. 육체적 쾌락 뒤에 따르는 고통은 그를 감내하면서도 추구하도록 만드는 마약과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를 벗어나기가 너무도 힘들도록 되어 있다. 수명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수명이라는 것은 신성회복을 위한 주어진 기회의 횟수이다. 육체적 쾌락의 추구는 그 만큼 신성회복을 위한 기회의 숫자가 줄어들게 되어 있다. 역으로 육체의 쾌락을 절제하면 그만큼 신성회복을 위한 기회가 늘어나게 된다. 반로환동이 그것이다. 늙지 않고 역으로 다시 젊어지는 것이다. 최소한 기회비용이 줄어들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신성회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반로환동의 차원을 넘어서 다시 태어난 신이다. 육체의 쾌락을 절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지극한 방법이 바로 초월이다. 초월은 이원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신성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한다. 누군가는 악을 행할 것이고 누군가는 선을 행할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이원성이라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고 그러면 그 누군가들은 또 다시 역을 바꾸어 행할 것이다. 그들이 이 이원성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렇다. 이 이원성의 세상에서는 선악의 역할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달리 행할 뿐이다. 이원성의 세상에서는 절대선도 없고 절대 악도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마지막 단계로 휘둘리고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으로 인하여 다시 탐욕의 길로 가게 된다. 바로 신비체험이다. 예수가 한 말이 있다. 두 무리가 있었다. 예수의 오른 편에 있는 자,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이다. 오른편에 있는 자는 축복을 받았고 왼편에 있는 자는 저주를 받았다.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은 평소 예수와 함께 신비체험을 하고 자신들도 행하기도 하였든 자들이다. 병도고치고 귀신도 몰아내었던 자들이며 예수와 같이 먹기도 하고 같이 행하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를 따르든 무리들이었다. 예수의 오른편에 있던 자들은 예수의 교훈과 가르침을 따르는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베푼 호의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들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있는지 반문 한 자들이었다. 당연 예수의 왼편에 있던 예수를 잘 알고 따랐던 자들은 그들이 행한 바를 자랑처럼 예수에게 주장하며 저주에 대해 항거하였다. 예수께서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예언을 한 것은 마지막 때에 그렇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즉 이 세상 떠날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이 가르침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이유는 종교지도자 자신들이 저주받는다고 예언한 말이기 때문이다. 병도 고치고 귀신도 몰아내는 신비한 체험, 이런 것으로 신성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이런 신비 체험은 무시할 수 없는 체험이고 유익한 체험이다. 이유는 이것이 신성회복을 위한 믿음을 더욱 크게 해주는 역할 때문이다. 이원론적 물리적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 설명이 불가한 신비적 체험은 그 이상의 영적 세상이 존재함을 연역적으로 설명해주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비적 체험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이들은 선생이 되어버린다. 세상의 선생이 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며 이는 그들의 삶의 가치가 그 대가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어 더 이상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된 보상 즉 신성회복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고 이는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대가를 받지 말라는 뜻이다. 그 자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뜻이다. 섬기는 자가 되라 하였고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고 하였고 지혜롭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 대해서 미련한 자가 되라고 하셨다. 천국은 낮은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대해 미련한 자가 되는 방법이 앎을 통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너희 보화를 세상에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아두라고 하셨다. 판단하지 않는 앎! 이것이 깨어남이다.

 

깨어남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송과체 이야기다. 단전호흡, 양신잉태 금강경 수련, 무지개 몸 수련, 명상수련, 무아지경수련, 쿤달리니 각성, 별 사면체, 머카바 , 차크라 등 여러 용어로 설명하지만 거의 다가 같은 수련이다. 머카바, 양신이라든지 무지개 몸이라든지 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살아서 하늘나라로 갔다는 자를 칭하는 것이기도 할 것 같다. 쿤달리니 차크라 수련을 통한 신비 체험이란 매력적인 것이 확실하다. 몸의 진동수를 높여서 빛의 몸으로 변환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신비한 체험이다. 그런데 모 종교에서는 무아지경을 수련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땡중 포함하여 선문답 같은 것으로 별 말장난을 일삼는 자들을 볼 수 있는데 어쩌다 세상이 저 지경까지 되었나 싶다. 진리는 그런 말장난으로 설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체득 되어지는 것도 절대 아니다. 그런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전부다가 말장난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런 경향은 특히 불교관련해서 그런 사이비들이 너무도 많이 나타난다. 진정 신비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우선적으로 이원성에서 먼저 벗어나야한다.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이에 대한 깊은 자각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실천의지가 나타나야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시행착오들의 반복을 통한 일정 기간의 훈련이 이어져야한다. 훈련은 어렵지 않다. 깊은 자각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깊은 자각은 생각과 마음 품기에 대한 이원성의 초월을 인지되는 모든 것에서 확인하고 다시 마음을 바꾸는 절차가 필요하게 된다. 이 훈련이 반복됨에 따라 숙련도가 깊어진다. 즉 실패해도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어떠한 소식을 보거나 들었을 때 이원론적 사고에 빠지는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 우선 되어야 한다. 이유는 인간은 모두가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필수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자각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리고 이원론적 사고에서는 판단이 일어나게 되고 판단에 따른 감정의 흐름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거의 동시간적이라고 할 정도로 같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생각하고 제어할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즉 제어할 기회는 감정이 먼저 마음에서 일어난 뒤에 그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항상 제어하는데 실패하는 주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것을 모르는 경우는 거의다가 제어하는 데 실패하게 되고 실패가 연속되면 바로 포기해버린다. 그래서 깊은 자각과 실천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감정이 일어난 뒤에야 제어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이에 대비하면 실패할 확률이 엄청 줄어든다. 혹 실패를 해도 왜 실패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도를 닦는 그런 것을 말함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도를 닦는 기분으로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호흡은 쿤달리니 수련에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처럼 호흡은 감정제어에 있어서도 너무도 중요하다. 호흡은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나는 훈련이 되지 않은 거의 모든 인류는 실상은 그 자신 안에 부정적 에너지를 가득 담고 살아가고 있다. 이원론적 세상이 바로 부정적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고 세상임금을 마귀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물질 세상은 부정적 에너지체가 지배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편끼리 있어야 편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항상 적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이를 위해 명상 훈련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 훈련이 잘되어지면 주변 에너지에 반응하는 민감도가 줄어들게 된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스스로도 다른 삼자에게 미치는 부정적 에너지가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부정적 에너지가 주를 이루는 이원성의 세상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삼자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방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긍정의 칭찬을 하면 부정적인 에너지 방출보다는 좋겠지만 인간에 따라 부정적 인간에게는 더 큰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부정적 에너지를 갑절로 돌려받을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게 된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 교만한 자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 뭐 이런 자들이 수두룩하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마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유는 오히려 오물을 묻혀서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칭찬해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는 인간들부터 자신이 잘나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깔보는 인간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 말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다. 깊은 호흡을 하는 순간 일어난 부정적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 찰나적인 시간이 상대에게나 혹은 어떠한 사실이나 사건에 대하여 초월하게 하는 힘이 창조된다. 이러한 행동을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행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나름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깨어남이 없는 선행은 일시적이고 외식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절대선도 없고 절대 악도 없는 것이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물 흐르듯이 그냥 흘러 갈 뿐이다. 깨어남은 아주 깊은 자각을 통해 일어나고 깊은 자각은 인내되어진 훈련을 통해 생겨난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완성을 입 밖에 내지 말라. 물리학자들은 대기 중 1입방 미터의 공간에는 지구의 바닷물을 전부 다 증발 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들어 있다고 한다. 초월의 힘이 생기고 증폭되면 그 에너지는 주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자기 자신도 변화되지만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처 변화시키는 힘이 생기게 된다. 이런 것은 아주 신비한 체험이 될 것임이 확실하다. 단순히 호흡을 수련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신비 체험을 신체적 감각기관을 통하여 체험하기 위함은 안 된다. 이러한 신비적 체험은 부수적으로 따르는 보상과도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사실은 많은 자들이 이를 목적으로 하므로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인에게 신체적 변화까지도 일어나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 역시도 아무 소용없는 무의미한 짓이 된다. 그러한 신체적 좋은 영향력이 영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에너지를 받아서 변화된 자가 계속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할 능력이 있을 때만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비적 현상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주변마저도 일시적이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호흡이란 중요한 것임을 입증한다. 우리들 신체에 흐르는 기운에다가 대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에너지의 합성으로 우리 생명체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신비한 현상도 아니며 인체구조상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러한 현상을 체험하지 못하므로 인한 신비적 체험이 된 것뿐이다.

 

소위 쿤달리니 각성이란 명상수련을 통하여 행하는 것이 일상적이고도 보편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기에 명상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호흡법을 같이 병행한다. 실상은 호흡법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단전호흡이 더 효율적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 이러한 신비 체험을 다들 목적으로 행하거나 건강상 이유로 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신성회복을 위한 차원에서 기초적인 믿음의 향상을 위한 방편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수련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호흡 수련은 신비체험에 한정되고 대체로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나 어설픈 도사만 양성하게 된다. 즉 신성회복으로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호흡법이나 명상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이나 어떠한 법칙에 대한 탐구나 학문적 연구나 기계장치에 대한 깊은 연구도 높은 지성의 범위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유는 명상이나 호흡법 등 역시도 집중하는 훈련이다. 그러므로 신성회복과는 별반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적 능력의 향상에는 도움이 된다. 오히려 지금까지 계속 강조하고 설명한 바처럼 이원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상태를 주시하고 초월하는 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빨리 신비체험에도 도달 할 수 있다. 종교적 교리나 교훈 등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신비적 체험에 빨리 도달 할 수 있으며 그 무엇보다도 다시 또 강조 하는 바 이원성에서 탈피하는 즉 초월훈련을 통해서 가장 질 좋은 토양을 만들 수 있으며 이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대한 이해 향상과 더불어 영성의 상승을 이끈다. 그리고 자체 내 에너지의 활성화가 이루어지면서 신체적으로도 진동수가 높아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영성의 발달과 함께 일어나는 부수적 현상인데 사랑하라고 하였으니 인류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자고 마음먹고 결심한다고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일시적인 영성의 고양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곧 바로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언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르게 일시적 현상으로 사라진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이미 원수라고 판단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불교에서나 명상에서나 호흡 수련에서 무아경지에 도달하려고 하는데 하지 못하거나 거짓된 것으로 착각하는 이유는 전부다가 이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므로 설사 찰나적 순간에 그러한 무아지경의 황홀경 비슷한 현상을 맛보더라도 말 그대로 찰나적 순간일 뿐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말자 라고 각오하고 그것에 호흡에 집중하는 그러한 방법 역시도 일시적 현상의 체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것은 신비체험과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이 없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무익한 것이다. 상념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대로 둔다는 방편 역시도 별무 소용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수련은 헛것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나는 훈련이 되면 어떠한 상태를 위한 특별한 결심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무아지경의 상태는 앎을 통한 무로 돌아가는 법을 터득 할 때 이루어지는 경지이다. 무아지경의 상태라고 특별한 상태가 아니다. 신비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이유로 인하여 무아지경의 상태를 마치 득도의 최 극점에 도달한 것으로 기술하고 가르치고 있으나 실상은 전부다 헛것이요 허무한 것이요 무익한 것이다.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무아지경이다. 그기에 어떠한 신비적 체험까지 포함시키면 일반적으로 칭하는 무아지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비체험은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할 뿐 특별한 유익이 없다. 신비적 체험은 무아지경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믿음의 향상을 도우는 방편으로서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영성과 인체는 유기적인 관계로 묶여있으므로 인간의 영성이 발달하게 되면 육체도 같이 부수적으로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신비체험이다. 인간은 어떠한 특별한 호흡법을 따르지 않아도 평상시 호흡을 무조건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이 발달하게 되면 육체에서 진동수가 높아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개별차가 있으며 그와 함께 신체적 고통도 수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체가 적응하는데 수반되는 통증이다. 특별히 두통의 경우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머리 전체적으로 발진 현상도 일어난다. 에너지 증폭으로 인한 부작용의 하나에 속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호흡법까지 같이 시행하면 에너지의 폭발이 인체에서 일어난다. 이 경우 의식까지 일시적으로 잃게 된다. 즉 혼수상태가 된다. 이런 위험한 경우에 대비하여 전문적인 지도자가 있는 상태에서 호흡 수련을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러한 모든 것은 무익하다.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전문적인 지도자가 옆에 있다 하여도 사실은 위험하다. 위급 시 응급조치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에너지의 폭발이 일어나면 빅뱅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완전한 백색의 광채의 폭발이 일어나는데 그 충격이 엄청나다. 복부아래에서 기운이 올라와서 유입된 공기 중의 흡입된 에너지와 융합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현상이 제3의 눈에 해당하는 송과체에서 인지되어 뇌에서 그 현상을 보게 된다. 완전한 순백광체이다. 어떠한 용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완전함이다. 눈을 뜬 상태에서도 순백의 광채만 나타나 보인다. 그리고 두뇌를 중심으로 상체까지 극심한 진동이 일어난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느낌과도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아주 심한 진동이지만 느낌은 실제로 전기에 감전되었을 때의 고통과는 다른 아주 부드러운 느낌이다. 다시 말해 극 미세 모래의 진동과도 같은 느낌인 반면 전기 감전시의 느낌은 거친 모래의 진동처럼 충격적인 것이 다르다. 전기충격의 경우에는 눈으로 보여 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전기 스파크 시 강열한 백색광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외부 스파크 시에 일어나는 현상이고 인체는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송과체에서 인지하여 뇌에서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에너지 폭발현상은 수차례 반복되어지면 인체 진동수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몸 전체의 진동도 폭발의 강약에 따라 달라지고 이는 호흡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빛은 각가지 기학학적 패턴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역시 진동수에 따라 나타나는 기학학적 현상도 다양한 형태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초기에 나타나는 백색광도 여러 가지 무지개 색상으로 혼합되어 온갖 아름다운 기하학적 무늬와 함께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동을 일으키며 평상시에도 그 미세한 진동들이 계속해서 인체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체험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목표로 하고 마치 어떠한 특별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착각하고 선생이 되려는 자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 까지도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점은 있다.

 

우리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보다 더 풍성하고 유익하며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성을 누리는 삶으로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안정되고 균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삶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하여 정체성의 올바른 자각이 우선 되어야하며 육체와 분리되어 취급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정체성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방편을 가지고 신성회복이라는 지상 과제를 달성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인류의 전체의 사명이자 목표가 되어져야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지성과 영성이 나아가는 것은 인류로서는 지대한 손실일 것이다. 신비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지금의 영성 훈련은 너무도 위험하고 그 부작용은 지극하다 할 것이다. 그기에 덧붙여 종교까지 인류를 분리하고 상호간에 배타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몫을 하고 있거나 허망한 신비주의로 빠지게 만들고 있다. 인류가 나아갈 바는 자존하는 신이 되어야 한다는 지상명제를 실천 가능케 하는 방편을 마련하고 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환경조성을 하는 것이다. 교육 환경에서부터 정규과정으로 영성 훈련 과정을 포함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종교를 넘어서는 영성교육으로 나아가면 종교의 영향력 또한 축소될 것이고 머지않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얼마나 영성 교육이 발달하는가에 달렸으며 올바른 영성교육이 바탕이 될 때 과학과 물질문명도 그 부작용이 최소화되고 효율은 극대화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인류는 전체적인 동반 상승이라는 지상최대의 과업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신들의 세상이 이루어 질 것이다. 바로 유토피아 건설이다. 지상에서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하여 세부적 실천사항들에 대해서 나눠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지만 가장 골칫거리인 종교세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경이라는 진리와 거짓이 혼재되어 있는 이 책의 모순과 오류를 계속해서 살펴보면서 종교의 세뇌에서 벗어나되 또한 성경에 숨겨지고 가려지고 변형되어진 진리를 찾는데 중점을 두고 진리 탐구를 통한 신성회복의 길을 걷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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