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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와 일제치하에서의 기독교도들의 친일행각을 정리한 게시판입니다.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13) - 갈홍기
글쓴이 : ※※※  (211.♡.190.175) 날짜 : 2003-10-26 (일) 20:02 조회 : 3237

갈홍기(葛弘基 1906∼1989)
1934 연희전문학교 교수
1943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 연성국장
1948 숙명여대 문학부장
1952 외무부 차관
1953 공보처 장관


 

 ●'배신배족'의 길을 간 교회 지도자

한국교회사에서 보면, 1930년대 중반 이후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의 시기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신학과 교회 제도가 크게 훼손되고 신앙이 훼절되는 비운의 시였다. 이 시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일본적 기독교'의 수립 요구는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치명적인 정치 권력의 종교 간섭 행위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 강간'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런데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행위를 부추기고 방조한 친일파 교회 지도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정치 권력의 상층부에서 세도를 부릴 수 있었다는 정치 현실 때문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 하에서 공보처 장관을 지낸 갈홍기 목사도 일본적 기됵교 수립 운동에 깊숙이 끼어들었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해방 이후 교회 일각에서 일제하의 과오의 죄과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고 있을 때, 갈홍기 목사가 속한 감리교회에서는 "회유와 공갈로써 기독교의 신도화(神道化)를 종용하였고, 황민화 운동의 급선봉을 삼으려"하였던 친일파 교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문서,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가 1947년 2월 감리교 목사(38명)와 신도들(54명)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惡企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기독교를 신도화시키며 일제의 주구를 만들기 위해 1943년에 이르러 당시의 보안과장 八木信雄, 正學會의 박준영, 보호관찰소장 長崎 三 등의 절대한 원호와 사주를 받어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 을 조직하였었다. 그러나 全鮮 유지신도와 교역자들의 결사적이 반대 투쟁으로 혁 신교단이 탄생 후 1개월에 유산되어 버리고 말자, 그들은 다시 경찰당국의 힘을 빌 어 감리교회의 영도권을 잡고 배신배족의 억행을 충실히 실천하여 온 이들의 이름 을 들면 다음과 같다.

정춘수(교단총리, 재단이사장, 상임위원회 회장, 황도문화관장)

이동욱(총무국장, 상임위원, 재단이상, 황도문화관부관장)

심명섭(교단본부 주사)

김영섭(사무관장, 혁신교단 총리)

갈흥기(연성국장, 상임위원, 『大和世界』 기자)

‥‥‥‥‥‥‥‥‥

갈흥기가 '배신배족의 악행'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선,s '경성기독교연합회'라는 일제의 어용 단체가 조직되어 이르바 '종교보국(宗敎報國)'을 서약하였다. 경성디곡교연합회의 조직ㅇ르로 교회 일각이 일제에 굴복해 버리자 지방의 교회들도 잇따라 굴복하기 시작하였다. 수원, 평양에 이어 인천에서는 1938년 6월 6일 인천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는데 갈흥기는 여기서 서무 직책을 담당하게 된다.

그후 1943년 11월 6일 전선종교단체협의회(全鮮宗敎團體協議會)가 학병 독려를 위한 조선종교전시보국회(朝鮮宗敎戰時報國會)를 결성하고 감리교, 구세군, 불교, 장로교, 천도교, 천주교의 대표를 선출할 때, 갈흥기는 이동욱 목사와 함께 감리교 대표로 선정되었다. 조선종교전시보국회는 11월 16, 17일 이틀 동안 지방도시를 순회 강연하면서 학병 독려 활동에 나섰는데 갈흥기는 함흥과 청진에서 강연하였다.

1944년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교역자들의 정신을 일본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연성회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는데, 감리교에서는 이미 1943년 8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교파 이름이 개칭되고 새로 교단 조직이 만들어졌을 때 연성 국장이 된 갈흥기 목사가 연성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성(鉛成)의 목적은 목사들에게 일본 정신을 넣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갈흥기는 1944년 2월 황해 지방에서 개최된 감리교 황해교구 '주관자 연성회'에 정춘수 총리, 이동욱 총무국장 등과 함께 참석하여 '황도기독교의 수립'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와 같은 연성회는 황해교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교회 지도자들에게 일본 정신을 불어넣는 수단이 되었으며, 결국 "교회는 본연의 구령(救靈) 운동보다 일본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생명을 잃고 해골화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한국감리교회사≫Ⅱ, 313쪽)

1943년 8월 이후 감리교단의 연성국장으로 활동하던 갈흥기는 1944년 9월부터는 상동교회가 폐쇄되고'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으로 개칭될 때 관장으로 임명되어 교역자들에게 일본 정신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다. 그 후로 전덕기 목사 이래 민족 운동의 요람지인 상동교회는 일본 정신을 전파하는 교육장이 되는 비운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 앞서 언급한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는 갈흥기를 포함한,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지도자들이 "기독교의 예배당인 서울 상동교회당을 '황도문화관'이라 칭하면서 신도(神道)세례를 강제로 거행케 하므로" 교역자들의 신앙과 절개를 파괴시켰다고 비난하였다. 해방 후 이처럼 가림교회 내부에서 친일행위로 비난받게 되자 감리교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나, 갈흥기는 1948년 숙명여자대학교 문학부장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이승만 정부하에서 주일 대표부참사관과 한일회담 대표를 지내는 등 학계와 정계에서 그의 활동범위는 더 넓어져 갔다.

갈흥기는 1906년 4월 14일 경기도 강화의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강형대는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에 걸쳐 활약한 항일 운동가이자 기독교사회주의자인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강화에 보창학교, 통진에 분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종사했다고 한다. 교육자 집안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갈흥기는 1925년 배재고등보통학교,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도미하여 학업을 계속하는 등 일제 치하의 어려운 시기에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31년 노스웨스턴대학과 개렛신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에는 시카고 대학 신학과에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그해 귀국하여 그의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1년 2월 말 현재 연희전문학교 교수 명단에 의하면, 그는 성서·교육학·철학개론 등을 가르쳤다. 같은 해에 그는 감리교신학교에서 종교 처 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34년 이후 19450년까지 그는 주로 감리교에서 발간하고 있던 신학 학술지 『신학 세계』에 「철학의 의의와 임무」「철학강의」「종교론」「인격의 의의」「근본주의 신학 서설」「근본주의 신관」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갈흥기가 전도사라는 직분으로 감리교의 목회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1월에 열린 기독교조선감리회 인천지방회에서였다. 인천지방회 일지는 감리교 성직자의 초기 단계인 연회 준회원 후보자로 천거된 갈흥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성명 : 갈흥기

연령 : 34세

현주 : 인천부 화수정 69

학력 : 미주 에반스톤시 개렛 신학교와 시카고시 시카고 대학 신학과 졸업

직업 : 연희전문학교 교수

그는 그해 5월 기독교조선 감리회 중부연회에 준회원으로 허입되어 인천지방 화도(化導), 영흥 구역의 부담임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194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불과 2년 후인 1943년 그는 감리교 목사 초년에 일약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의 지위에까지 올라갔다.



●'충실한 대변인' 공보처장 갈흥기
갈흥기는 교회 목사로서 또는 대학교수로서의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관리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1948년 후반부터는 잠시 숙명여자대학의 문학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이사관에 임명되어 외무부에서 비서실장으로 일하엿다. 그는 1951년에는 주일 대표부 참사관의 지위에 올랐고, 다음해 2월에는 결원중이던 외무부 차관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대통령 이승만과 유착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외무부 차관직은 몇 달 못 가서 끝나고, 1953년 3월 8일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공보처장에 임명된 갈흥기는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으로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취임사를 발표하였다.

원래는 외무관계 사무에 종사해 온 까닭에 공보행정에 대해서는 지식과 경험이 아울러 불충분하다. 더욱이 조국통일의 궁극목적 달성을 위한 현 성전하에 있어서 공보행정 임무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오직 송구한 생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만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는 동시에 국민 제위의 진정한 심부름꾼이 되고자 최대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바이다(『동아일보』, 1953년 3월 10일자).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으로서의 갈흥기의 역할은 그가 그 자리를 그만두는 1956년 7월까지 충실이 수행되었다. 정부 대변인으로서 그는 특히 대통령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공산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충실히' 대변해 주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승만의 이념적 대변인이었던 셈이다.

이승만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으로서의 공보처장 갈흥기의 역할은 1953년 10월 사회민주주의자이자 인도 수상인 네루가 "한국이 휴전 조항을 무효화하려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UN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취하는 행동에서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바란다"는 기자회견 내용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하였다. 갈흥기 처장은 네루 수상의 발언에 대해 즉각 담화를 발표하고, 그를 '유화주의자'가 아니라 '소련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면서 그의 발언을 통박하였다.

지난 10일 봄베이에서 개최된 기자회견 석상에서 인도 수상 네루 씨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한국을 악독하게 공격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통신보도에 의하면 그는 한국이 한국의 휴전 조항을 무효화하려고 기도하도 있다고 하였으며, UN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취하는 행동에서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네루 씨의 이와 같은 공격은 전혀 옳지 않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자기의 입장을 상당히 솔직히 표명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는 한국에 대하여 부당히 도전적이며 모욕적인 말을 한 끝에 명백히 말하기를 "우리는 한편으로는 북한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공군과 상대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유화주의자가 하는 말이라기보다 더 나아가서 바로 소련의 앞잡이들이 하는 말로써 이는 우리들이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다만 인도측이 애써가며 숨겨 온 사실 즉 네루 수상은 공산국가를 대변하고 있으며 따라서 네루 수상이 대표하고 있는 인도는 중립국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도가 국제관계에 있어서 자기 지도자의 정책을 추종함을 구태여 반대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중립'이라는 범위에서 벗어난 것을 명백히 자인한 네루 수상의 지령을 받고 있는 인도군이 지금 한국에서 반공포로들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엔 깊은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번 네루 수상의 말에 우리는 조금도 놀랄바 없다. 다만 그동안 우리들이 가졌던 의심이 다시 한 번 정당화 되었음에 불과하다. 여하간 이제 네루 씨는 세계에 대하여 명백히 그리고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자기는 공산측에 가담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도는 소위 '중립적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없음을 표명한 것이다.(『동아일보』, 1953년 10월 14일자).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특히 단독 북진 주장은 1954년에는 국제사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그해 3월 필리핀 외상 카로스 가르샤는 만일 이 대통령이 유엔의 허락없이 한국군의 북진을 명령한다면 필리핀 정부는 그 군대를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국전쟁시 유엔군측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필리핀과 태국뿐이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필리핀 군은 1개 대대에 불과했으나 필리핀군의 철수는 심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때도 저웁 대변인 갈흥기는 "우리는 맹방, 특히 극동에 있는 맹우들이 우리와 보조를 같이 하기를 바란다"면서 아시아 국가들이 반공에서 함께 보조를 취할 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주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극동 제국가는 특히 단결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의 정책이 약화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맹방들이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우리와 서로 단합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던 이승만 정부의 입장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국제 사회로부터, 심지어는 정부 스스로가 맹방으로 여기고 있는 나라들로부터도 비판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이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남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국제 여론을 비난 또는 반대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이런 태도는 1954년 4월 26일부터 한국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개최된 제네바 회의에 대한 불신에서도 잘 드러났다. 제네바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호주 외상 케이시의 발언이 전해지자, 갈흥기 공보처장은 이를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우리들이 희생을 당해 가면서까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책을 수락할 수는 없는 것이다"고 정부의 입장을 밝히면서 필요하다면 남북을 통하여 선거를 실시하여야 한다는 케이시 외상의 남북선거론에 경악을 표명하였다. "케이시의 성명과 같이 그 의도하는 바가 아무리 선량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적에게 원조와 위안을 주며 또한 몇 개월 내지 1,2년간의 평화를 위하여 공산분자에게 항복하려는 회유분자들을 격려하는 결과로 되기가 십중팔구일 것이다."

휴전회담 이후에도 남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판문점의 정치회담, 제네바 회의 등이 계쏙 열렸으나 그 회의들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불신은 가시지 않았다. 이미 1951년 6월 휴전 제안이 대두될 때부터 이승만은 "조속한 평화라는 허황한 약속에 속아가지고 결국 더욱 크고 더욱 무서운 전쟁의 서곡이 되어 버릴 어느 평화안도 수락하지 않음을 전세계에 경고"한 바 있었다. 이승만의 그 같은 평화회담 반대 입장은 정부 대변인인 갈흥기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각하께서 늘 주장하시는 바와 같이 공산진영과의 평화회담이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주 진영이 공산 진영과 협의하여 어떠한 평화적 해결을 요망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의 어리석은 일이다(≪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73쪽).

당시 이승만 정부의 입장이 이처럼 평화회담 자체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 구상할 수 있는 방안은 '단독북진'뿐이었고 이것은 남북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을 모색하고 있던 국제 사회의 여론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갈흥기는 이승만의 단독북진 주장을 "우리의 힘과 우리의 손으로 통일을 전취(戰取)하자는 것"이라면서 그 주장을 옹호 또는 대변하고 있었다. 예컨대, 1954년 5월 12일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산 세력과 투쟁하기 위한 단독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를 사실 무근이라고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단독북진도 불사한다는 정부 방침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이 무렵 이승만은 평화회담이란 것이 다만 공산진영의 재침략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우방국가들이 동조해 주기를 바랐으며, 이를 위해서 그는 1954년 7월 24일 20일간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는 민의원 부의장 최순주(최淳周), 국방부장관 손원일(孫元一), 육군 참모총장 정일권(丁一權), 주미 한국대사 양유찬 등 20여 명이 동행했는데 갈흥기 공보처장도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 방문시 이승만은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와 회담하고 "우리는 한국에 관한 우리의 공동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밀접하고 호혜적인 협조하에 같이 노력을 계속하려는 우리의 결의를 재확인한다"는 공동 성명을 얻어냈다. 이 성명서에 대해 갈흥기는 "멸공 전선에 어디까지나 동생동사의 운명 공동체임을 재확인"한, "북진통일의 확고한 구체적 기초"가 정립된 것이라면서 그것을 "우리 국부"의 외교적 성공으로 평가하였다.

휴전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계속해서 이승만 정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무력에 의한 통일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29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렸을 때 정부대변인 갈흥기는 그 회의가 공산 진영과 의 공존을 모색하는 회의라는 이유에서 한국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반둥회의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우리 정부는 공존 사상이나 또는 유화정책에 지배되는 여하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비극적인 '제네바' 회의가 끝난 후 이미 이를 전세계에 선언하였던 것이며 장래 우리의 이러한 정책에는 추호도 변동이 없는 것이다.

'반둥'에는 인도의 '네루'의 교사를 받은 주은래(周恩來)가 나타나서 평화적 외교관의 탈을쓰고 중공을 위하여 소위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데 그가 부르짖고 있는 정의란 자유세계가 마조도(馬祖島), 금문도(金門島), 대만, 팽호제도(澎湖諸島), 한국 그리고 모든 동남아세아를 양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둥'에서 야기되고 있는 또 하나의 위험한 사태는 주은래와 일본 대표 사이에 진해오디고 있는 극비 회의이다. 이미 공산 지역과 공동보조를 반쯤 취하고 있는 일본은 중공, 북한의 괴뢰 정권 및 소련과 정식적 외교 통상 및 문화 관계를 맺을 것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이쓴 것이다. 일본은 미국을 배반하고 있으며 새로운 아세아 제국을 몽상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동아일보』,1955년 4월 25일자).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접촉을 위험한 사태로 파악했던 갈흥기는 다음날인 4월 26일에도 일본이 친공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일본은 진정한 반공국가이며 공산진영 국가들와 통상을 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에는 정치적 의미가 없다는 일본 수상의 발언에 대해 공박하면서 일본이 공산국가들과 통상을 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세계정복을 협조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갈흥기의 일본에 대한 유사한 비난은 한 달 후 일본이 북한과 어로협정을 협의하고 있을 때 다시 등장하였다.

북한과 일본의 어로협정에 대해 갈흥기는 "일본의 용공 정체를 폭로한 것이며 이로써 일본을 동아(東亞)에 있어서 반공 세력의 일익으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계획과 정책이 얼마나 현명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대일 인식이 얼마나 결여되어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증거가 되고 말았다"고 언명하였다.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일본의 공산국가들과의 접촉에 대한 비난 이후, 일본이 용공 정책을 수행하고 있고, 일부의 상사들이 북한과 통상 관계를 수립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한국 정부측의 주장은 항의에서 끝나지 않고 한일 관계가 그토록 악화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사사오입 개헌에서 보여 준 충성
갈흥기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옹호와 대변은 1954년 11월 대통령의 중임 제한 조항을 철폐하고 종신제를 보장하는 사사오비 개헌 곽정에서도 충실하게 나타났다. 당시 헌법 개정안은 처음에는 투표 결과 재적 3분의 2의 미달로 부결이 선포되었으나 사사오입(四捨五入)을 하여 개헌안 통과로 회의록이 수정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사태에 대해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나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 등은 개헌은 부결된 것이 명백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공보처장 갈흥기는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것이 정부의 견해라면서 개헌의 불가피성을 우리의 안보와 관련시켰다. "정부를 전복하려는 적의 침투 계획이 자유 대한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개헌안을 불가피하게 한 것은 즉 이 위협이 있는 까닭이다" 결국 이 개헌으로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다시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를 자행, 마침내 학생 데모와 국민 저항에 봉착하여 몰락하고 말았다.

1954년 11월의 개헌안과 관련하여 갈흥기가 취한 태도는 야당에게 정치적 공격을 불러 일으켰다. 12월 13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 갈 공보처장 파면 결의안이 정식 의제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갈흥기는 공보처장 자리를 계속 지켜 나가다가 1955년 2월에는 개정된 정부 조직법에 따라 공보실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2월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에 취임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활동 범위를 더 넓혀 나갔다.

갈흥기는 그 자신이 말대로 이승만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다 1956년 7월 사표가 수리되어 공보실장 자리를 오재경에게 넘겨 주었다. 공보실장 자리를 사임하기 지겆ㄴ 4월 말에 그는 국가공무원이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을 위한 선거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민주당에 의해 선거법 위반으로 제소 되었다.

공보실장 자리에 있으면서 갈흥기는 두 권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하나는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1956)≫인데 이 대통령이 지으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그 자신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평소 앙모해서 저술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또 한 권의 책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1955)≫인데, 여기서 그는 이승만이 예수나 석가처럼 아무런 '나'도 없고 어떠한 '사'도 없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개척하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삶을 살아왔다고 칭송하였다.

우리 한국의 창건자! 세계의 민주 선봉! 세기의 위인! 민족을 위하여 형극의 길을 걸어오신 현대의 성자! 이 나라 한국을 위하여 이 겨레 3천만을 위하여 기리기리 만수무강하심을 비는 바이다!

1989년 8월 30일 『조선일보』는 1단 기사로 공보처 장관과 말레이시아 주재 대사를 역임한 갈흥기 씨(83)가 8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는 1966년 박정희 정부하에서도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냈고, 1973년에는 1966년 서울에서 창립된 아스팍(Asia and Pacific Council)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에 취임하는데 그후 그는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다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일제 말기에는 일본을 위해 충실히 헌신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대변인 노릇을 충실히 했고, 생애 말년에는 박정히 정부를 위해 신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이 같은 인생 역정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갈흥기는 1953년 공보처장에 취임하면서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는 동시에 '국민 제위의 진정한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진정한 심부름꾼이 되겠다는 약속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신앙과 민족적 양심을 내던졌던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족과 양심을 버린 사람, 이런 사람만이 어느 국가 또는 어느 정부에라도 충성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다양한 인생 역정에 대한 답변도 이 점에서 차자야 할 것이다.





빨래거둬! (218.♡.201.4) 2003-10-27 (월) 01:20
일제때의 많은 기독교 수뇌(거의 대부분, 나머지분들은 방관자)들 ---> 친일, 반미  ---> 해방 후 ---> 숭미, 반공

간과 쓸개를 자유자재로 왔다리 갔다리 할 수있었다는게 놀라울 뿐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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