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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와 일제치하에서의 기독교도들의 친일행각을 정리한 게시판입니다.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37) - 고황경
글쓴이 : ※※※  (211.♡.109.107) 날짜 : 2004-09-13 (월) 21:43 조회 : 3328

고황경 (高凰京, 1909∼     )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1937년 애국금차회 간사.
1939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간부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협조

고황경은 일제 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여성으로는 드물게 박사학위를 소지한, 가히 우리나라 최초의 지식인 여성의 대표라 할 만한 인사이다. 1928년 일본 도지샤(同志社)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1931년 도지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최고 수준의 교육은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바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데 이용되었다. '고황경 그는 일찍이 선각자적 현안으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곧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오히려 친일적인 인사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협조하는 행적을 남기고 있다. 제7대 총독 미나미는 일본의 국체를 인식시킴으로서 신민(臣民)된 자각을 갖게 하는 사회교화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한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하였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매월 1일 가정에서 황거요배, 축제일의 국기게양, 총독부의 의례준칙 준수, 혼·상례의 간소화, 누습타파, 근로보국정신의 앙양, 국한그릇 찬하나의 식사 간소화' 등이었다.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정례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하였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단체의 활동을 선전·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하였으며 고황경은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을 다녔다.

또한 1937년 1월에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하였다. 여기서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하였다. '내핍과 절약으로 전쟁을 이기고 천황께 신명을 바치자'고 하고 있으나 당시 조선 여성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일하는 노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가난한 소작농가의 여성들은 모두 농업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소작농가는 5할에서 7할에 달하는 고율 소작료를 지불했다. 즉, 여성의 농업노동은 곧 일제의 식량 수탈과 농업노동력 수탈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는 특히 식량 수탈을 위해 '산미증식계획',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면서, 조선의 농촌이 낙후된 원인을 일본과 비교하여 여성들이 외업노동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여성들을 옥외노동, 야외노동에 동원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른바 '전가(全家)근로'라는 구호 아래 읍·면부락 단위로 부인회가 조직되고 야외노동단, 공동면작 등으로 여성노동이 최대한 활용되는 등 여성 농업노동에 대한 착취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촌여자는 소보다도 힘세며, 소보다도 끈기있다'고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유년노동이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하루에 14시간씩 혹사당하면서도 일본인 남자의 4분의 1도 못되는 임금을 받았으며, 열악한 작업환경과 자유가 없는 기숙사생활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박사 사회학자 고황경은 비참한 조선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 여성들을 더욱 착취하는 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고황경이 미국에서 받은 사회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가 회의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말처럼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곧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면 그 교육은 분명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신음하는 조선 동포들에게 침략자들의 횡포를 고발하고 나아가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철학박사 고황경의 실천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을 배반하는 데로 자신의 학문이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그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일본과 미국을 통해 배운 학문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면 강단의 이상과 식민지의 현실이 너무나 동떨어져 끝내는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일제에 협력하는 길만이 진정 조선 민족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대답이 자뭇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실망하게 하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친일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이른바 내노라 하는 여류명사들이 이미 변절의 대열에 모여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별다른 문제의식이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이 대열에 쉽게 참가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만 것이다.


애국금차회 간사로 활약

수렁에 한번 내디딘 발은 빠져 나올 줄 모르고 계속 들어가기만 하였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자리까지 맡게 된 것이다. 1937년 8월 16일 조선 중앙 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들의 금비녀·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산금량이 군수체제하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총독부는 '조선산금령'을 공포하고, '금의 사용제한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국방의 목적 이외에는 금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여, 장신구 제조 금지는 물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금제품과 장신구까지도 극성스럽게 긁어 모았다.

그리고 '우리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우리가 애용하는 금비녀야말로 이 초비상시에 국가를 위해 바치치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결의하게 하면서 금비녀·금가락지를 뽑아갔다. 또한 금반지를 아끼는 여자를 '비국민'으로 매도하면서 손가락을 자르라고 폭언까지 하였으며 심지어는 촌부의 구리 가락지까지 동원하였다. 동시에 애국금차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의 위문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으로 정하였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하였다.

1939년 9월 10일 고황경은 {동양지광}이 주최한 '내선일체좌담회'에 박인덕*, 쓰다(津田節子:녹기연맹 회장 津田榮의 처) 등과 함께 참여하여 부인층의 비상시적 각오와 내선일체에 대해 토론하였다. 1939년 1월에 창간된 {동양지광}은 '반도 2천만 동포의 심흉에 일본정신을 철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이 될 것'을 창간의 목적으로 하고 있는 잡지였다. 1941년 말 조선에 배당된 국·공채 중 공채 미상환액만 11억 600만 원으로 발표되었으며 이 액수는 호당 곡가로 환산하면 13가마 꼴이었다. 이 살인적 액수를 소화하기 위해 총독부는 단체, 학교, 직장의 장을 동원하였다.

이를 위해 임전대책협의회는 1941년 '임전대책 연설회'를 마친 후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2개 반으로 편성된 이들 '채권가두유격대'는 '애국운동은 이론보다 실천에서' 라는 슬로건으로 1원짜리 꼬마채권을 가판했는데 서대문대로 편성된 고황경은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하였다. 침략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제는 일반 부녀자들까지 총후운동에 대대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銃後婦人)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황도정신을 선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 데도 앞장 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그는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이 영광이야말로 과거 34년 동안 역대 총독과 위정자 여러분이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반도 동포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여 분투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굉대 무변하옵신 성은에 오로지 공황(恐惶)·감격할 뿐입니다.……성은을 무엇으로 보답하올까. '나라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서 힘 다하여라. 임금님의 군사로 나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을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경기여고 교장을 거쳐 1946∼48년에는 미군정청에서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하고, 다시 1949∼50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귀국해서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재직하였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58∼86년 대한어머니회 회장,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1963년 걸스카우트 단장, 서울여대 명예총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하였다.


 
 ■ 장하진(충남대 교수·사회학)

참고문헌

고황경,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建軍)정신에 투철], {매일신보}, 194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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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가리 (210.♡.212.250) 2004-09-14 (화) 12:51
나 웃긴건, 왜 이 기독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자유사상이나 시민정신을 배우고 와서는 파시즘적인 일제에 복종했냐는 거다. 그 예수가 고난을 당했을때도 그렇게 쉽게 로마에 넘어 갔었나?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그 후예들은 변절해도 된다는 논리인가? 좀 답을 해달라!! 이 역사 의식도 없는 기독인들이여!
부메랑 (210.♡.107.129) 2004-09-14 (화) 04:07
서울여대 병설이었던 한샘중, 화랑초등학교 교장도 겸임했었져. 개독 미션스쿨.
맨날 눈 앞에 보던 할무이..입니다. 국어교과서에도 등장햇는데 요즘 책엔 나오는지...
공중변소든 뭐든 자기가 일단 쓴 화장실은 꼭 청소 해 놓고야 떠난다는 걸로 자랑을 삼던 할무이...
엄청 오래 살고 4년 전에 떠났죠. 불과 몇 년 전까지 살아 있었다고요!!! 큭~ 좀더 살았음 내가 가만 안 두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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