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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톨릭등 모두 포함)라는 종교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포인트 :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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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일 : 2015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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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삼자 이계석선생님의 칼럼입니다.

이제라도 배달민족 답게, 즉시 내 민족의 품으로 돌아오라.
예수교는 우리 배달민족의 생리에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잔인과 독선과 배타만을 양산해내는 무서운 독(毒)이다.


   
*26[예수의 사상에 대한 고차원적 분석]
글쓴이 : 제삼자 날짜 : 2012-07-31 (화) 05:51 조회 : 4663
[예수의 사상에 대한 고차원적 분석]


A.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는 어렵다.
B.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위의 2 가지 논제 중,
A는 물리적(물질적)인 이야기이고, B는 도덕적(정신적)인 이야기이다.
따라서, A와 B는 서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관계이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富者)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원래는 밧줄?)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여호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태 19; 23~24)

부자(富者)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이다.
결국, 부자가 천국에 가는 일은 불가능이라는 말이다.
<약대의 바늘귀 통과하기>와
<부자의 천당 들어가기> 비교이다.

얼른 생각하면 성립되는 말 같지만, 전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궤변이다.
<약대를 바늘귀로 통과시키는 일>은 어떤 재주(능력)이고,
<부자가 천당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 재주가 아니라, 훌륭한 인격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2)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여호와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태 19;25~26)

인간의 재주로는 약대(밧줄)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호와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전지전능한 재주를 가진 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야 들리는 말이다.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상대로 떠드는 말이 아니다.
즉,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야 천당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돈을 모아 부자가 되려면, 그 과정이 아름답지 못할 가능성이 많을 것이며,
또, 부자가 된 뒤의 삶이 아름답기도 대단히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훌륭한 인격을 닦아야  천당에 들어 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인데, 
부자는 여러가지 사정상 천당에 들어 갈만큼의 훌륭한 인격을 닦을 수가 없다는 경고의 말이다.
천당은 능력이나 재주로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예수가 떠들어 놓은 말은 무슨 뜻일까?
도덕적(윤리적)으로 결함이 있건 없건,
재주가 좋은 여호와는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는 말밖에 더 되는가?

사람 쪽에서는 아직도 설익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데도,
여호와 쪽의 전지전능한 재주만 있으면 아무나 천당으로 보낼 수 있다 이거지?
이런 것을 자랑이라고 떠벌이는가?

여호와에게는 전지전능한 재주가 있어서,
<덩치가 대단히 큰 약대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에게는 전지전능한 재주가 있어서,
인격적으로 미완성인 사람을 천당으로 보낼 수 있다고 자랑하는 짓은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3)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主=예수)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예수)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 19; 27~28)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예수의 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제자들의 질문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여호와로서는 할 수 있다>-------------예수의 답변
<제자들이 부모 처자식과 생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름>------------인간의 행위

이 경우,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사람이 쟁취한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예수)가 베푼 은혜인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여호와로서는 할 수 있다>는 말과 어떤 관계인가?
생업을 버렸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한 자격으로 얻은 벼슬인가?
아니면, 여전히 여호와(예수)의 재주가 뛰어나서 나타나는 세상 이치인가?




4) ["또, 내(예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 19;29)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 그리고 재물을 버렸다면, 그 짓은 인간의 행위인가 여호와의 짓인가?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여호와로서는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인간 쪽에서 부모 형제 처자식과 재물을 다 버렸기 때문에 천국을 얻었거늘, 여호와가 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소리인가?


결국은 모든 것이 인간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내용을 가지고,
<사람은 할 수 없으나, 여호와(예수)는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길게 떠들어 대고 있다.

이보다 더 진짜 알짜배기 궤변이 또 있을까? 



[ 마음의 평정을 얻은 자는 어떤 위치에서도 성공자이다. ]


제삼자 2012-08-03 (금) 03:15
[붕어빵 속엔 붕어가 없다]


붕어빵 속엔 붕어가 없다고 한다.
마찬 가지로, 히브리(이스라엘) 사회 속에는 예수가 없다.
더욱 희한한 모습은 예수교 속에 신(여호와=예수)이 없다는 사실이다.
각설하고,


예수교(예수의 가르침)의 전도 행각은 아무에게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국이나 중국 등,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이 전도 행각이었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도 멀쩡한 사람에게는 예수교의 전도질은 금기 사항이다.

오직,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도 잃어 버린 족속 즉, 실패작으로 태어난 낙오자들에게만 예수교의 전도질은 허락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 이스라엘 사회 속에는 예수에 관한 한 그 그림자도 없다.
엉뚱하게도 유럽과 남북미 대륙을 비롯하여 한국 속에서 그 예수교란 것이 활개를 치고 있다. 


1) [12 사도(使徒)의 이름은 이러하니,
1. 베드로라 이름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2.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3. 야고보와, 그의 형제
4. 요한,
5. 빌립과
6. 바돌로매,
7. 도마와 세리
8. 마태, 알패오의 아들
9. 야고보와
10. 다대오, 가나안인
11. 시몬과 가룟
12.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12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 10;2~6)

예수의 12 제자에게 사도(使徒)라는 직책이 주어진다.
사도(使徒)란 예수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세상에 전파하는 직책이 주어진 사람을 말한다.

12 사도들은 몇 년 동안 예수와 동거동락(同居同樂)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스승 예수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제자들에게 사도(使徒)의 중책이 맡겨졌음직 하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아니, 명(命)한다고 했다.

"전도함에 있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바로 옆 동네)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재차 말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족속에게도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오직 잃어버린 즉, 낙오된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의 예수교(쟁이)는  아무에게나 예수의 말을 먹이려고 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이스라엘 족속 속에는 예수의 그림자도 없고, 엉뚱한 이방인들의 사회 속에서만 예수가 좌충우돌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변명할 수야 있겠지만,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라고 떠들어지고 있는 여호와(예수)의 말은 그 "변덕이 죽 끓듯"하고 있으니, 어찐된 일일까?  


2) [(예수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12 제자)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는냐?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호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한 6;47~65)

예수는 스스로를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면서,
이 생명의 떡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인격자라면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알기도 하고 믿기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제자(사람)들이 어떻게 사도(使徒)의 직분을 맡을 수 있는가?
사람이 어떻게 신(神)의 세계를 알리는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종교로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간 된 자로서 신(神)을 알기도 하고, 신을 믿기도 하고, 신에게 예배도 드리고, 신을 설명도 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말이 있다.

"여호와가 허락하지 아니하면, 누구라도 예수에게 올 수 없다."
즉, 여호와의 허락이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의 예수에 대한 '신앙' '불신앙'은 인간 쪽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여호와의 소관 사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교는 인위적인 전도 활동을 지상 명령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위적인 전도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다는 말이다.
되는 말인가?

전지전능한 신(神=여호와)의 허락 여부로 결정되는 일을 인위적 활동으로 달성하겠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참고로 한 마디 첨부해야 될 것 같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여호와에게 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위에서, "여호와가 허락하지 않으면, 예수에게 올 수 없다."는 말과 어떤 관계일까?


"예수를 통해야 여호와를 알게 되고, 여호와가 허락해야 예수를 알게 된다."

"철수야, 너의 집은 어디에 있는냐?"  "영수네 집 옆인데요."
"그럼, 영수야, 너의 집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 집은 철수네 집 옆이야요."

이런 순화 논리에 빠져서 자기 인생을 노예로 만드는 자들이 바로 예수쟁이가 되는 첫번 째 덕목이다.

바이블에는 단 한 구절이라도 모순(矛盾)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단, 몇 줄만 읽어 나가면 서로 상충(相衝)되는 말들의 연속일 뿐이다.

바이블(예수교) 속에는 신은커녕, 더러운 쓰레기와 가짜와 악독만이 가득할 뿐이다. 
제삼자 2012-08-13 (월) 09:47
[새 술은 새 부대에?]


여러 해 전, 필자는 '나라가 사는 길'이라는 제 하에 "조상이 물려준 전통과 얼을 되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글을 올렸었다.
여기에 대하여 어느 예수쟁이가 "조상을 찾아봐야 나올 것이 없다"는 의미의 욕 말을 하더니, 느닷없이 예수의 가르침인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를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새 술은 새 부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헌 부대보다 새 부대가 더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새 부대는커녕 헌 부대도 없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
따라서, 새 술은 새 부대가 아니라, 형편에 맞게 살아야 옳다.


(2) 새 술을 말한 것으로 보아, 헌 술이란 것도 있는 모양인데, 그 헌 술이란 게 무엇일까?
상하거나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술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그 썩은 술은 새 부대 건 헌 부대 건 담을 필요 없이 내다 버려야 한다.

구태여 새 부대 헌 부대 얘기가 무엇에 필요할까?


(3) 술을 만들면 즉시 새 술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제 이전에 사용하던 부대는 버리고, 새로 부대를 만들어 담아야 하나?
(억지 소리 좀 할까)
그런 다음 하루가 지나면 조금 낡은 부대에 옮겨 담고...5일쯤 지나면 아예 사용 불가능한, 구멍 뚫어진 부대로 옮겨 담아야 하는가?


(4) 필자를 공격한 사람은, 쾌쾌 묵은 조상의 '얼'을 찾아봐야 쓸 데 없는 일이니, 최신식 예수교의 가르침을 터득해야 최고라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를 떠들어 댄 예수야말로 쾌쾌 묵은 2,000 년 전의 미개 시대 사람이다.


(5) 지금은 새 술이건 헌 술이건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종류의 그릇을 불문하고 깨끗한 용기(容器)에 담으면 족한 것이다.


(6) 한국 예수교는 술을 금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술 얘길 했을까?
온갖 못된 짓은 골고루 찾아내어 자행하는 자들이 그 잘 난 술과 담배로 예수쟁이를 차별화 하는 짓은 웃기는 일이다.


(7) 필자는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새 부대 건 헌 부대 건, 그것은 필자를 공격한 예수쟁이들의 소관 사항이다.
예수쟁이들은 술을 새 부대에 담아 놓고 먹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8) 만약, 그 '새 술'이 '귀중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필자는 부대와는 거리가 먼 곳에 보관한다.

고급 시계, 각존 보석 반지 등 귀금속과 집문서, 유가 증권 등은 모두 은행 박스에 보관하고 있다.
(참고로, 은행 박스들은 모두 몇 십 년 전에 만들어진 헌 것 같아 보인다.) 
물론, 더 귀중한 보물이 있는데, 알다시피 그것은 가슴 속에다 보관하고 있다.


(9) 예수의 "새 술과 새 부대" 얘기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이, 맹물에 몽둥이 삶은 맛으로, 즉흥적으로 떠들어 놓은 말일 뿐이다.
새 술은 무엇이고, 새 부대는 무엇이라는 해설이 없다.

새 술은 귀중한 것을 의미하고, 새 부대는 아이를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나이 먹은 사람은 헌(낡은)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필자를 공격한 사람도 분명 아이가 아닌 헌 사람일 텐데, 다시 말해서 자격 미달의 주제에 감히 '새 부대'를 주워 섬긴 것 아닌가?


(10) 필자는 그래도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아이를 '어린이'라고 하듯, '얼간 놈' '얼빠진 놈'이라고 할 것을 '얼간 이' '얼빠진 사람'으로 표현했었다.
그런데, 반 만 년의 찬란한 역사 속에다 구정물과 쓰레기를 쏟아내는 "얼간 놈" "얼빠진 놈"에게 인간 대접을 하려던 필자의 생각이 짧았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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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왕 예수 비유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소개하겠다.
소위 "가라지 비유"라는 것을 보겠다.

(마태 13;1~9, 마가 4;1~9, 누가 8;4~8)

[곡식 밭에 원수(怨讐)가 가라지(강아지풀, 잡풀) 씨를 덧뿌려,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더란다.
종이 그 가라지를 뽑으려 하자, 주인이 가로되 "그냥 놔둬라. 가라지를 뽑으려다 곡식도 뽑을까 염려된다.
추수 때까지 두었다가 그 때에 알곡은 내(여호와의) 창고에 들여쌓고, 가라지는 불태우겠다."고 한다.

이상이 예수가 가르친 명언(?)이다.]


(1) 밭에서 김을 매지(잡풀 제거 작업) 말라는 가르침은 이 세상에 바이블(예수의 가르침) 외에는 없다.

(2)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이미 여물어 밭에 떨어진 뒤가 된다. 곡식과 가라지의 구별 작업은 물 건너 간 일이다.

(3) 가라지(잡풀)를 제거하지 않은 밭에서는 곡식이 자라지 못한다.
추수 때를 기다려 봐야 얻어지는 것은, 알곡은커녕 쭉정이도 없다.

(4) 세상에는 곡식(기독교인들)도 있고, 가라지(기독교인들을 제외한 원수들)도 살고 있는데, 그 원수들이 멸망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현상을 변명하려고, 어거지로 뚜드려 맞추어 놓은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한 신(神)의 말은 모순 없이 자연 섭리에 맞아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 섭리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겠는가?
이 짓이 예수교의 신(여호와=예수)의 하는 일이다.
제삼자 2012-08-16 (목) 08:21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예수쟁이들)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 5 ; 13)


대단히 유명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가 제자(예수쟁이)들에게 떠들어 놓은 훌륭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TV 나 컴퓨터가 고장나서 제 구실을 못하면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고쳐서 쓸 수도 있다.) 
그릇도 깨져서 제 구실을 못하면 쓰레기로 내다 버려야 한다.
그러나, 소금은 제 맛을 잃을 리가 없다.

애초부터 짠 맛이 없는 것은 소금이 아니며, 소금은 짠 것이며, 짠 것이 소금이다.
따라서, 소금은 그 짠 맛을 잃지도 않고, 짠 맛이 없는 것은 애시 당초 소금이 아닐 뿐이다.


그런데, 예수는 가정법을 써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쩌고 저쩌고" 했다.
이리 저리 아무리 따져 보아도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초부터 짜지 않은 것은 소금이 아니며, 짠 것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언제나 소금일 뿐이다. 

구태여 예수가 소금을 비유로 말이 하고 싶었다면, 다음과 같이 말을 했어야 했다.

"소금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오염(汚染)된다면 먹을 수가 없어 버려야 한다."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말이 엉터리로 짜여져서야 되겠는가?
예수의 소금 이야기는 전혀 말이 성립되지 않는 말장난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진짜로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다음과 같이 엄청나게 뛰어난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게다.
2,000 년 전, 미개 시대였슴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의 과학을 떠든 셈이 되기 때문이다. 

"소금의 분자식은 <NaCl>이다.
이것을 전기분해하면 나트륨(Na)과 염소(Cl), 이렇게 2 가지 원소로 바뀌게 되어, 이것들을 직접 식용으로 해서는 위험하다.
그러나, 나트륨과 염소를 짠 맛을 잃었다고 해서 쓰레기로 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나트륨과 염소는 공업용으로 쓰이는 소금보다 대단히 값 비싼 상품이다.
알겠는냐? 메롱!" ㅎㅎ...


쓰레기는 쓰레기장에다 버려야 하는 것이지, 사람이 밟고 다니는 곳에 버려서도 안 될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이라면 무조건 훌륭한 말이려니 하고 인용하기를 즐긴다. 

바이블 속의 소금 비유는
언론 매체,
각종 교육 현장,
심지어는 불교의 스님들조차 경쟁적으로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가 우리와 직접 경쟁자가 아닌 2000 년 전 사람(?)이므로, 너도나도 추켜세우기를 즐긴다.
예수를 믿는다 어쩐다 하는 짓도 그가 현재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경쟁자가 아니므로 주어지는 아부이다.

만약 예수가 지금 우리 곁에서 활동하는 자라면,
우선적으로 예수교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성토하며 죽이려고 악을 쓸 것이다.
예수는 단 칼에 이단 아니면 3 단 4 단으로 몰릴 것이다.
인간(특히 예수쟁이들의 습성)은 그런 것이다.


한 예로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죠오지 워신턴은 대통령으로 재임 기간 중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저항과 미움을 받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자, 그는 단번에 국부(國父)로 칭송된다.
세상의 모든 통치자 또는 유명한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죽은 사람은 경쟁자가 아니다.
그래서, 죽은 자에 대해서는 자기가 손해 되지 않는 만큼 너그럽게 칭송하는 것이다.
역사 속의 위인들도 거의 모두가 이런 원리에 의하여 칭송도 되고 부풀려지는 것이다.

예수(여호와)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여호와)가 직접 인간들의 곁에서 활동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즉, 경쟁자가 아니므로 예수쟁이들에 의하여 떠받들려지는 모양새를 갖추게 될 뿐이다.
이것이 세상의 진리이다.

진짜로,
예수(여호와)가 나타난다면, 가장 먼저 예수쟁이들에 의하여 극렬한 비판을 받다가 마침내 오만 가지 오물을 뒤집어 쓰고 예수는 비명 횡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진짜 신이 나타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진짜 신(특히 여호와=예수)은 없는 것이다. 
제삼자 2012-08-21 (화) 05:54
[우쭐거리기를 좋아하는 녀석]


여호와는 힘이 쎄서 그런지 우쭐거리기를 좋아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출애굽기 4;10~11)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는다.
즉, 여호와는 모세에게 중책을 맡겼다고 한다.

옛날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태우던 시절 일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백성 히브리는 애굽(이집트)에서 400 여 년 동안 종살이를 했다고 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호와는 불쌍한 히브리를 종살이에서 건져 주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히브리를 종살이에서 건져 내려면, 애굽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녀석에게 방법이 그런 것 밖에는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여호와는 애굽 왕과 협상(담판)을 해야 할 중책을 모세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은 말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며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한다.
이에 여호와는 우쭐거리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사람의 잘나고 못나고, 건강하고 병드는 현상이 모두 여호와가 베푸는 능력"이라고.
언변이 좋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여호와가 도섭을 부리게 되면, 대단히 훌륭한 외교관으로 둔갑시켜 줄 수가 있다는 뜻이다. ㅎㅎ...

그렇다면,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들도 모두 여호와의 농간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힘이 쎈 여호와는 세상을 배배 꼬아서 불행한 일을 만들어 놓고서, 이것들을 인간으로 하여금 당해 보라고 윽박지르는 꼴이다.


잘하는 짓이다.
그러나, 여호와(예수)의 그 전지전능은 이런 일에 써먹으라고 주어진 것인가?
아서라. 그 악독한 장난질(?)에 대한 벌을 어떻게 받으시려고 그러실까?
여호와가 만들어 놨다는 그 지옥불에 들어 갈 자는 여호와(예수)가 제1 순위로 분명하다. 
제삼자 2012-08-27 (월) 10:44
[엉겅퀴]


예수교의 신 예수 가라사대, "엉겅퀴는 못된 놈이다."

엉겅퀴는 못된 놈이어서 불에 태워 버려야(지옥으로 보내 버려야) 될 나쁜 놈이라고 한다. 


 


바이블 내용(예수의 떠드는 소리)을 보기로 하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 7; 16~20)

엉겅퀴는 못된 놈이어서 불못(즉 지옥)에 던져 넣어 버려야 될 놈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요즈음 농촌에서는 엉겅퀴 재배로 쌀농사의 3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엉겅퀴에서 간경화, 산후부종, 간질환 및 고혈압에 좋은 그 어떤 물질을 추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예수가 떠들어 놓은 말들은 무엇일까?
아직도 뭔가를 더 떠들고 싶은 예수쟁이는 남아 있겠지? 그게 나쁜 열매가 아닐까?
제삼자 2012-09-10 (월) 15:08
[모르고서 하는 일]


사람이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서 행하는 언행(言行)에는 무슨 의미(가치)가 있을까?
특히, 인간이 신(神)에 대하여 모르는 현상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일까?

태어나자 마자 부모가 유기하여 버려진 아기가 시설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부모의 얼굴은 물론 그들에 대한 어떤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부모도 몰라 보는 죄 또는 불효>가 성립될까? 


1)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호와)여, 저희를 사(赦)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 23;34)


이상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한 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빌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여호와 쪽에서도 이 모든 사실(인간이 몰라서 저지르는 짓)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사(赦)하라 말라 할까?
또,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성립되기에 무엇을 용서하라는 것일까?

옳든 그르든 간에, 히브리 사람들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종교가 가르쳐 놓은 전통에 따라 이단(異端)을 처단해 왔다.
이에 준하여 히브리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예수와 히브리 사람들 중 어느 쪽이 정당한 쪽일까?

다시 말하면,
예수는 여호와의 이름을 참칭(僭稱)한 죄인이며, 예수를 처단하고 있는 히브리 사람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럴 경우, 여호와에게 누가 누구의 죄를 사(赦)해 주라고 탄원해야 되는 것일까?


"여호와시여, 젊은 혈기에 예수는 크게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죄값으로 예수는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예수를 용해 주옵소서."
예수를 죽이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야 제대로 된 상황 아닐까?


"아버지(여호와)여, 저들의 죄를 사하십시오. 저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반하장(賊反荷杖)에 해당하는 넌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잠시 예수의 부활 장면을 먼저 보아야 될 것 같다.


2) [...안식일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主=여호와)의 천사가...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태 28;1~6)


주변 상황을 살펴 보면, 
미명(未明=날이 샐 무렵), 
2 명의 마리리아,
큰 지진,
천사가 있으며,
수직하던 사람들은 무서워 떨고 있었다.

큰 지진 속에서도 2 명의 마리아는 아무 감각(반응)이 없다.
무덤을 막은 돌은 천사가 굴려 내고, 예수의 시체는 이미 없었다.
물론, 예수의 부활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3)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해가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마가 16;1~6)


여기서는 미명(未明)이 아닌 해 돋을 때이며,
여자는 2 명이 아닌 3 명이며,
천사가 아닌 청년이며,
돌문도 천사가 열지 않고 이미 열려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큰 지진 이야기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으며,
무서워서 떨고 있는 사람도 없다. 마태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수의 부활 장면은 없다.


4) [...여자들이...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2 사람이...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누가 24;1~5)


마태, 마가의 이야기와도 상황이 다르고,
여기에서는 천사라는 표현 없이 2 사람이 등장한다.
물론, 큰 지진 이야기도 없다.
여기에도 예수의 부활 장면이나 시체는 없다.


5)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나이다."하니,]

(요한 20;1~2)


여기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1 사람(여자) 뿐이며, 천사 비슷한 것도 없다.
마리아는 무덤 근처까지만 왔다가 돌아간 것 같다.


1. 일점 일획(一點一劃)도 하자가 없다는 신(神)의 말씀이 담겼있다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 가지 책(바이블)의 내용이 모두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2. `큰 지진`이 발생했다면 기록에서 누락될 사건이 아니다.
무덤을 경비하던 사람들까지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됐던 사건이다.
이런 커다란 사건이 마태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3. 천사 또는 사람이 1 명이라고도 하고 2 명으로도 되어 있다.
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천사라는 것은 사람이 보고서 알 수 있는 존재인가?
천사는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


4. 예수의 무덤에 찾아간 사람(여자)은 1~3 명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는 숫자인가?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5. 예수의 시체와 부활 장면을 본 사람이 없다.
천사 또는 어떤 사람, 그것도 1 명인지 2 명인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통하여 듣기도 하고, 요한에는 아예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6. 바이블의 모든 기록은 여호와(예수)의 존재와 그 능력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록마다 다르게 씌어져 있으며, 결정적 장면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왜인가?


7.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3 번 씩이나 말해 주었었다.
이보다 중대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은 집에 돌아가서 머물고 있다.

겨우, 막다라 마리아의 연락을 받고 무덤에 나타난다. 될 법한 상황인가?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결론;
예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며 사(赦)해 주라고 했다.
예수의 부활 장면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로 믿을 수 없게(모르게) 한다.
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도 몰라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사(赦)의 대상이 못되고 지옥으로 가야 될까?
인간이 신(神)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의 말을 빌면, 모르고서 하는 일(예수를 믿지 않는 일)은 사(赦)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모르고서 믿는 짓(아는 체)은 무엇일까?

예수쟁이 중에 신(神)을 아는 자가 있을까?
모르는 자들이
"밑져야 본전 식으로 믿는 짓"
"혹시나 해서 믿는 짓"
"바이블 내용을 모르면서 적당히 믿는 짓"
"주위 환경에 의하여 믿는 짓" 등등,
사실상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여호와(예수)를 믿는 짓은 무슨 처벌을 받아야 되는가?

예수의 말을 듣고 싶다.


믿지 않는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와 양심에 의지하여 내린 결정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믿는 사람은 신(神)에 대하여 아는 체를 하고 있으며, 자신의 책임을 적당히 전가(轉嫁)시키려는 심보를 숨기고 있다.

예수에 의하면, 전자는 사(赦)의 대상이다. 그러면, 후자는 무엇의 대상인가?
이것도 예수의 말을 직접 듣고 싶다.

예수쟁이들은 신(神)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자신도 속인 죄값으로 무엇을 받게 될까?
사람이란 속이는 짓과 책임을 전가(轉嫁)하려는 짓이 없다면, 신(神)을 믿는 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옳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며 속이는 짓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예수쟁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제삼자 2012-09-11 (화) 00:04
[제자를 저주하여 죽인 잡놈 예수]


예수는 자기 직제자에게 저주를 하여 죽인다


[인자(예수)는 자기에게 기록된대로(예언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유다)에게는 화(禍)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번하였느니라.]

(마태 26;24)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될 일,
유다가 예수를 팔아 먹을 일 등등...
세상에서 되어질 모든 일은 어느 한 가지도 빠짐 없이 여호와가 태초에 계획을 세워 놓은 예정된 일이라고 한다.

여호와 쪽에서 예정해 놓은 때가 되자 유다에게 마귀(여호와가 부리는 부하)가 들어 간다.
이렇게 되면 유다의 언행은 유다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이 분명하다.
인간 유다가 여호와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유다는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여호와(예수)쪽에서 일방적으로 세상에 내어보낸 것이다.
유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도 유다의 뜻이 아니라, 예수가 일방적으로 선택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제자 유다에게 예수는 말한다.
"너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좋을뻔 하였다." 고.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서운 저주인가?
 

예수는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자기 아버지 여호와에게 빌었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면, 유다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유다에게는 여호와가 집어 넣은 마귀가 활동하고 있었다.
유다는 여호와가 계획을 세워 예언한 일에 자기도 모르게 악역(惡役)으로 발탁되어 꼭두각시 놀음을 하다가 그 벌로 몸이 근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 죽는다. (사도행전 1;18)

이유야 어떠하던,
예수는 자기 제자를 저주하여 죽인 잡놈 반열에 우뚝 서게 된다. 아멩! 
제삼자 2012-10-02 (화) 12:48
[시사여귀(視死如歸)]

금년(2012 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한 부부가 한국으로 필자를 찾아 왔었다. 그들 부부는 필자를 꽤나 좋아해서 수십 년 동안 매년 한 두 차례 찾아 주기도 하고, 수시로 안부 전화도 걸어 오며, 우리 부부를 직접 초청하여 즐겨 주기도 한다.
그 전부터도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안면은 있어 왔지만, 그들 부부가 필자와 결정적으로 첫 인연을 맺은 것은 그들의 혼인식에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1980 연대 초), 신부될 아가씨와 그 가족은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신랑될 청년은 불법 체류자로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시기였다.
혼인식이 끝날 때 쯤이면, 신랑 신부의 양가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대표 인사를 하는 것으로 혼인식을 마무리하게 마련이지 않던가? 그러나, 혈혈단신으로 불법 체류 중이던 신랑 측에 대표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이 미국 내에는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랑은 양가 대표 인사를 신부 측에 넘겨 주기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 때 마침, 신랑이 좋아하며 따르던 상대가 바로 필자였던 것 같다. 필자는 당시 미국에서 한인 학교(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 과정까지의 정식 법인체)의 교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결국, 신랑의 부탁을 받아들여 필자가 두 사람의 혼인식에서 양가를 대표하여 인삿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0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 부부는 필자의 가정과 무척이나 찰떡 같은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남편되는 사람은 일류 재단사로서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커다란 세탁소를 운영하며 큰 돈을 벌었다. 20 여 년 전에는 세계 시장이 인정하는 뛰어난 디자인(design) 실력을 발휘하여 망해가는 미국인 봉제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능력가이기도 하다. 그는 임진년 생이니까, 금년이 그의 환갑이다.

지난 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그들 부부에게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닥쳐왔다.
그들은 아들만 둘을 두고 있는데, 그 중 작은아들이 여러 가지로 부모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어려서는 머리도 영리하고 제법 공부도 잘하여 그의 부모는 큰아들보다도 작은아들 쪽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잘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작은아들은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작은아들을 조국(한국)의 모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아들의 주위에서 좀 좋지 않은 친구들 만이라도 격리시켜 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허락을 했다고 한다. 또, 한국에는 3,4 촌 거리의 연고자도 몇 있고, 아들 쪽에서도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미국에서와 마찬 가지로 한국에서도 작은아들은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25 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이킬 수 없는 중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신부전증 말기>로서 다른 사람의 장기를 기증 받는 길 밖에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급한대로 아들을 한국의 어느 대학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서, 부부가 미국과 한국을 며칠 씩 번갈아 오가며 병간호를 하게 된다. 병세가 워낙 위급하기도 하고, 통증이 너무 심해서 당장 미국의 병원으로 옮겨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의 세탁소와 공장의 문을 닫을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가장 어렵다는 말에 거듭거듭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찌어찌 하여 겨우 미국의 병원으로 이송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져서야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날, 그들 부부와 필자의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무슨 말을 해야, 환자와 그들 부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입발림으로 듣기 좋은 소리 또는 흔한 말로 적당히 얼버무려 주는 것으로 그들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는 없었다. 십 수 년을 더 살아 온 인생 선배(?)라는 위치가 이렇게 절박하고 무거운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마침내, 오랜 시간 동안 머리 속에서 희미한 그림으로만 맴돌던 생각, 한 번도 입 밖으로 표현해 본 적이 없어서 필자 스스로도 자신 없는 말을 끄집어내어 어설프게 나마 그들을 위로해 보기로 작정을 하게 된다. 아직, 어휘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어디로부터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을 맺어야 할지도 모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침묵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았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다음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아직도 아래 말(글)은 완전하게 정리되지 못한 것이다. 젊은 환자와 그 부모에게 어떤 위로가 됐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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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그러니까 2006 년, MBC TV에서 <주몽>이라는 역사 대하드라마가 상영됐었다. 동시에 그 해, KBS 1 TV에서도 <대조영>이라는 역사 대하드라마가 방영되었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이고,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 사람이다.
그 두 사람은 700 여 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TV 드라마를 보면서 실감하는 것은 주몽이나 대조영이나 거의 비슷한 시기의 고대 사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로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700 년이라는 커다란 시차가 있는데도 같은 시간대의 동일 선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느껴진다는 말이다. 장장 500 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 왕조나 조선 왕조를 통째로 집어 넣어도 풍덩 들어가고도 남을 700 년이라는 길고도 긴 시간 간격인데도 시차가 없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처럼 실감이 되고 있다.
어떤 사건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보면, 먼저의 사건이나 나중의 사건이나 모두 같은 시대의 시간 선상에 놓여지게 된다. 불과 1~2 천 년의 시간이 지나갔을 뿐인데도 그렇다. 시차를 두고 발생했던 모든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같은 시대 또는 같은 시간대로 응집됨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 등, 어떤 나라도 500 년 내지 1,000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 왕조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로는 다 그려 낼 수 없는 파란만장한 역사와 우여곡절이 들어 있다.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태어나서 수 없이 많은 사건을 만들며 살다가 수 없이 많은 사연(또는 한)을 안고서 죽어 간 역사! 여기에서 그 역사를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파란만장이라는 말 한마디로 압축하기에는 너무 아쉽기도 하고 억울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등, 아무리 긴 역사를 품고 있어도 우리 머리 속에서는 파란만장은커녕 오히려 몇 개의 점(點=작은 흔적)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도 불과 1~2 천 년 밖에 지나지 않은 경우일 때 한하는 것이다. 앞으로 만 년 또는 10만 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500 년 내지 1,000 년 따위는 진짜 점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점은 위치만 있을 뿐, 모양이나 크기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만 년이나 10만 년 정도가 아니라, 무량대수의 세월 내지는 무한대(영원)의 시간 속에다 우리 인간이 향유하는 짧디 짧은 역사를 섞어 놓으면 어떤 것이 될까? 아무리 큰 사건이나 긴 역사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의 점으로 결집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명이 길어졌다는 오늘 날에도 90 살까지 산 사람이 있다면 장수한 사람일 테고, 미처 40 세를 넘기지 못했다면 단명한 사람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우리 인간의 감각이 현세적으로 느낄 때, 90 살과 40 살은 그 수명의 시간적 간격을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90 살이 넘은 어느 노인(또는 노파)이 죽으면, 소위 호상(好喪)이라 하여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40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유가족을 비롯하여 그 둘레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상황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고구려의 19 대 광개토대왕은 38 세에 죽었고, 20 대 장수왕은 97 세까지 살았다. 광개토대왕은 지극히 단명한 사람이고, 장수왕은 노령화 사회인 오늘 날에 견주어도 장수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러나, 1,500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의 감각으로 뒤돌아보면, 광개토대왕의 짧은 수명이나 장수왕의 길다란 수명이나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그게 그것일 뿐이다. 아니, 두 사람 중, 어느 쪽의 것이 더 행복했느니 또는 불행했느니 하고 겨루어 볼만한 아무런 건더기조차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감각으로는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되는 장수한 사람의 긴 시간이나, 단명한 사람의 짧은 시간이나, 그 수명의 길이에 하등의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장수한 사람이 향유한 긴 시간이나, 단명한 사람이 누린 짧은 시간이나,1,000 년은 고사하고 100 년도 되기 전에 기쁨이나 슬픔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들 모두는 잔잔하고 고요한 너른 바다처럼 평화로운 곳에 안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보면, 인구 1,000 만을 넘는 뉴욕, 멕시코시티, 상하이, 뭄바이, 런던, 서울 등등의 대 도시가 조그만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4.3 광년) 별이라고 알려진 센타우루스(Centaurus) 자리의 프록시마(별)에서 보게 되면, 대 도시는 고사하고 아예 지구 자체가 보이지도 않는다. 지구 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130 만 배나 더 큰 태양조차도 먼지 크기로 겨우 보일까 말까 할 것이다. 심지어는 별을 1,000 억 개나 포함하고, 지름이 10 만 광년이나 되는 원반 모양의 <우리 은하계>조차도 200 억 광년이나 되는 먼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간이 200 억 광년으로 끝나던가?
이상의 계산은 공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도 적용이 된다. 따라서, 몇 천만 년 또는 몇 백억 년이라는 시간 속에다 인간이 겨우 향유할 수 있는 50 년이나 100 년의 시간을 섞어 놓아 봐야 아무런 흔적도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주(宇宙)는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 속에서는 아무리 긴 시간도, 아무리 큰 부피도, 아무리 심각한 사건도, 속된 표현을 빌면 조족지혈(새발의 피)만도 못한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 인간이 몸 담고 있는 우주 속에서는 크고 작음, 길고 짧음, 깨끗하고 더러움, 좋고 나쁨,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따위를 모두 초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우주 속에서는 삶과 죽음이 따로 없으며, 기쁨과 슬픔도 사실상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 자신이 바로 우주의 일부요, 우주를 구성하는 한 요소라는 사실만 자각한다면, 죽음을 비롯한 어떤 경우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커다란 물체라도 무한히 먼 곳에서 보면 점에 불과하다. 아무리 긴 시간도 무한히 먼 시간 후에 보면 점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점은 위치만 있을 뿐, 크기도 모양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점 속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어떤 것도 들어 있을 수가 없다. 모양과 크기가 없는 속에는 어떤 것도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점과는 달리 우주는 한 없이 긴 시간과 무한히 큰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아무리 큰(긴) 것이라도 우주 속에 들어가면 지극히 작은 점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 속에는 모양과 크기가 없는 점들만 가득하다는 말이다.
밤 하늘을 보면, 별이 가득함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직 그 별들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멀리에서 보면, 마침내 그 별들은 점으로 바뀌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우주 속에는 모양과 크기가 없는 점들만 있는 것과 마찬 가지가 된다. 없는 것이 가득하다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점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 갈 수 가 없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경우이고, 우주 속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점과 같이 작아지기 때문에 역시 우주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무한히 작은 점과 무한히 큰 우주가 결과적으로는 똑 같은 개념에 도달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점이 우주요, 우주가 바로 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시간, 사건, 사람) 중에 우주(또는 점)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던가? 결국, 우주(또는 점) 속에서는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또는 삶과 죽음 등등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어느 종교의 최상위(最上位) 가르침 중 하나에 해탈이란 것이 있다. 해탈이란 속박이나 번뇌 따위의 굴레에서 벗어나 편안한 대자유의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해탈과 같은 뜻을 가지는 열반이란 것도 있다. 그런데, 열반은 죽음과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 바로 대자유의 경지에 들어서는 해탈이라는 말이다.
해탈을 방해하는 굴레(속박과 번뇌)는 나쁜 것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에서도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사랑의 굴레가 씌워지고, 미워하는 사이에서는 미움의 굴레가 씌워진다. 성공자는 유지해야 하는 굴레가, 실패자는 재기해야 하는 굴레가 씌워진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굴레는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의 굴레일 것이다.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 자체가 이미 굴레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참고; 일체개고(一切皆苦)-인간이 무상,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그로써 온갖 고통에 빠져 있슴을 이르는 말.

제사(祭祀)는 4 대조(高祖)까지 받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 세대를 25 년으로 계산하여 4 대는 100 년이다. 즉, 사람이 죽고서 100 년 정도가 지나면, 다른 사람들은 물론 후손들의 기억에서조차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까지 얽혀 있던 굴레 마저 벗어 던질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100 년이 지나면, 세상과 얽혀 있던 모든 굴레로부터 완전히 풀려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마침내 우주 속으로 스며들어 우주와 하나가 되거나, 우주화(宇宙化)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굴레와 다름 없는 나의 실체가 없어지고 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때 또는 우주화 되어야 시간과 공간과 사람 등,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의 해탈 경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우주가 모든 것을 초월하듯, 사람이 우주와 동체(同體)가 될 때, 사람도 비로소 모든 것에서 초월하게 되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침내 죽음 자체가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오고 감의 순서가 조금 씩 뒤바뀌는 것처럼 보여지면서, 늙은이와 젊은이, 부모와 자식, 애틋한 사랑으로 얽어 매인 연인(부부)은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무한대의 대자유(안식처)를 향해서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은 먼저 가는 사람으로 해서 서로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잠시 후에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한 가지도 차질 없이, 그 곳으로 뒤따라가서 하나(우주화)되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죽음이요 필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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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의학이 가장 발달한 미국의 병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아직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희망을 가져 볼 수 있게 되었군요. 그러나,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마음을 넓고 부드럽게 하여 평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 바랍니다.

<시사여귀(視死如歸)>라는 말을 들어 봤나요? ''볼 시'', ''죽을 사'', ''같을 여'', ''돌아올 귀'', 이렇게 넉 자로 이루어진 사자성어(四字成語)입니다.
<시사여귀>란,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설익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슬프고 안타깝고 두려운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죽음이란 영원히 평화롭고 안온한 고향(안식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비단 이번 뿐만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마음을 닦는 거울로 삼아도 좋을 것입니다.

좀 더 붙잡아 두고 마주하여 정담을 나누고 싶지만, 큰 꿈을 위하여 유학차 외국으로 떠나는 연인과 국제 공항에서 잠시 아쉬운 송별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조금 쯤 시간이 뒤바뀔 수도 있지만, 머지 않아 금방 우리 모두는 또 다시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이번의 미국 여행이 희망을 잃지 않는 조용하고 마음 평온한 여행이 되기 바랍니다. 부디 조심해서 가십시오.



[명예(名譽)]

명예(名譽)란 무엇일까?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자.
명예-- "세상에 널리 인정받아 얻은 좋은 평판이나 이름"

세상에서는 이 명예를 획득하려고 혈안이 된다.
획득하고 싶어하는 욕망 순서도 명예-권력-돈 이렇게 나열하는 게 통례이다.
돈을 많이 벌고, 권력(출세)도 가질만큼 소유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명예까지도 거머쥐려는 꿈을 꾸게 된다.

욕망을 인간의 본성에 따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인간의 본성을
(1) 생존적 본능,
(2) 생식적 본능,
(4) 생태적 본능,
(5) 사회적 본능으로 나눈 다음,
각각의 본성에 따라 나타나는 구체적 욕망으로는 식욕, 성욕, 명예욕 등, 20 여 가지로 나뉘는 모양이다.

욕망(식욕, 성욕, 수면욕, 지배욕, 경쟁욕 등)은 살아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현상이다.
일단, 당사자가 죽은 다음에는 어떤 욕망이라도 그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이다.

사람이 가진 욕망 중에서 가장 질기고, 터무니 없이 크고 긴 것이 명예욕인 것 같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인간의 이 명예욕을 나타낸 말이다.
옛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면, "청사에 길이 남을 명예" 욕심이 인간의 가장 큰 욕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깊이 생각을 더듬어 보아야 될 것이 있다.
진실된 명예를 획득할 만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자기 자랑을 한다든지,
자기를 내세운다든지,
잘 난 체를 한다든지,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려는 짓 따위와는 거리가 먼 대단히 고매(高邁)한 인격자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매한 인격자의 언행은 숨겨져서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거짓 없는 훌륭한 인격자, 고매한 인격자의 업적은 세상에 알려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에 널리 인정받아 좋은 평판이나 이름"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경우는,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크게 잡은 사람이 명예까지 욕심을 낸다는 사실이다.
되는 경우 같아 뵈는가? 욕심 한 번 야무지다고나 할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벌고, 출세를 하려면,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그 내막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고, 보이는 명예는 가짜(거짓) 명예 또는 속임수 명예이다.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게 움직인 대가로 얻어지는 명예는 어차피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세상에는 명예가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명예>라는 것도 있고, <명예 훼손죄>라는 것도 굴러다닌다.

보이지 않는 명예, 없는 명예가 어떻게 존재할 수도 있고, 어떻게 훼손될 수가 있을까?
없는 명예도 존재하고, 가짜(거짓) 명예도 훼손되는 경우가 있는가?

명예 훼손죄라는 말은 "명예 기만죄" 또는 "명예 도둑질 죄"로 바뀌어 불려져야 될 것이다.
없는 명예를 지키겠다는 발상은 사람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는 도둑이 되겠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이 세상에 <명예>라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명예 훼손죄>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참고;

인생 70 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에도 유명한 정치인, 유명한 학자, 유명한 기업인, 유명한 종교인 등등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 명사 중에 각종 비리와 썩은 냄새로 얼룩지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허명이나 허세로 포장되지 않은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느 사이에 그들 모두는 역사에 등재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악했던 사람이라도 일단 죽어진 사람을 상대로 악평(사실은 올바른 평가)을 하기는 쉽지않다.
죽은 사람에게는 생전에 자행해 놓은 악행들에 대한 모든 것이 봄눈 녹듯 용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조금 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죄과의 흔적은 잊어지고(?), 업적이란 것만 커다랗게 부풀려져서 역사로 기록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밝디 밝은 대명천지 세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초현대(요즈음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인데도 그들의 죄과는 망각되고, 업적(명예)은 점점 과장되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어둡디 어두운 세상에서, 독재와 전제로 꽉꽉 묶여 있던 고대, 중세, 전근대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기득권자들의 명성과 업적과 명예가 과연 진짜 모습일까?
다시 말한다. 이 세상에 <명예>라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없다는 말이다.

절에 가 보면, <요사채>라는 것이 있다.
사찰 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특히, 본사 사찰이나 커다란 절의 요사채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여러 개의 방들 중에서 가장 후미지고 퇴락한 방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하루 세 때 밥만 축내고 있는 늙고 병든 중들이 들어 있다.

종정, 방장, 총무원장, 주지 그리고 각종 감투(?)를 쓴 중들처럼
출세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하고,
명예도 얻지 못하고,
건강하지도 못하여,
결국, 상좌(제자 또는 양자 등)도 거느리지 못하고,
자기 절도 가지지 못하여,
남의 절에 얹혀서 근근히 연명하는 불쌍한(?) 중들이다.

여행하는 젊은 중들 중에는 이 초라한 실패작의 중들이 기거하는 방을 드려다 보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 다음 어쩌다가 서로 안면이 있는 중의 얼굴을 만나게도 된다.
이 때, 젊은 중이 늙은 중에게 건네는 인삿말,
"아이구! 여태 안 갔어요? (여태 안 죽고 살아 남았어요?)
"그러게 말일쎄. 이렇게 여태 남아서 신세를 지고 있구먼."

이 때,
종정, 방장, 총무원장, 주지들처럼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한 쪽과
돈도 못 벌고, 남의 절 구석방에서 밥만 축내는 쪽 중,
어느 쪽에 명예를 획득한 사람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예측되는가?

어쨌든,
만약에 명예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명예는
평생 동안 중 생활을 하고도 돈 한 푼 없고, 집도 절도 없는, 그래서 푸대접 받으며 죽지 못해서 살아 남아 있는 초라한 중들 속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정치인, 관료, 학자, 법조인, 의료인, 연예인, 종교인 쪽과
KBS 1의 프로그램 <지오그래피>에 등장하는 7,80 대의 무식한(?) 시골 농사꾼 중, 어느 쪽에 그 명예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가?

가짜(거짓) 명예 또는 사람을 속이는 명예라면 모를까,
많이 배운 사람, 돈을 많이 번 사람, 출세를 한 사람에게는 명예가 얻어질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느 선(線)을 넘어간 학식, 어느 선을 넘어간 부자, 어느 선을 넘어간 출세, 어느 선을 넘어간 명성은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마찬 가지이다.


(꾸며낸 말이겠지만)

甲은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계획도 짜고,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귀신이 甲의 하는 일이 훌륭해 보여서 어떤 방법(기적?)으로든 甲의 하는 일을 도와 주려고 했다.
그러자, 甲은 자기의 설익은 인격을 한탄했다고 한다.

"내 인격이 얼마나 경솔하기에 하는 일과 마음을 귀신에게 들키게 됐을까?"

하물며, 귀신도 아닌 사람에게 들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업적을 세상이 떠나 가도록 떨벌이는 사람에게 <명예>가 가당한 일일까?
명예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며, 그 명예를 획득한 사람 자신조차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실제로 <명예>를 획득할만한 인격자는 시대와 환경과 주위의 시기심으로 제대로 된 삶은 물론 목숨조차 유지하기가 어렸다.
심지어, <명예> 대신에 <무명(無名)>이나 <오명(汚名)> 내지는 <누명(陋名)>을 뒤집어 쓰지 않으면 다행이다.
반대로, 갖가지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조작된 명예, 거짓된 명예가 횡행한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요, 현실이요, 세상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100 % 아니, 적어도 80~90 % 이상의 완벽에 가까운 인격자라면,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할 것이매, 방해 받지 않고 대단히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참된 <명예>이다.


[세뇌(洗腦)]


세뇌(洗腦)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洗)--씻을 세, (腦)--뇌 뇌, 그러니까 단순하게 한자 풀이를 하면, 뇌를 깨끗하게 씻어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세뇌(洗腦)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면,
"어떤 사상(思想)이나 주의(主義), 신념(信念) 등을 머릿속에 주입하거나 또는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여,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행동을 개조함"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세뇌(洗腦)란 2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1) 사상과 주의와 신념이 <파란> 색으로 물들어 있던 사람이 누군가의 설득과 가르침으로 <파란> 색을 씻어 내고 <빨간> 색으로 변했다면, 그 현상이 바로 세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린 아이 시절에는 그 마음과 생각이 어디에도 물들지 않아서 하얀 <백지>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던 백지에다 부모와 주위의 기성 세대들이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을 시켜 놓게 된다.
이런 경우에도 세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결과가 형성된다.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심어지고, 일본 사람은 일본에 대한 애국심이 심어진다.
어떤 노래를 여러 번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래와 가수에 대한 팬이 된다.
축구나 농구도 여러 번 반복해서 관전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팀과 어느 선수에 대해서 강렬한 호감을 가지게 된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간섭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당과 어떤 정치가의 열렬한 응원자가 된다.
TV광고를 반복해서 시청하다 보면, 상품의 질과는 상관 없이 어느 상품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상의 현상들도 모두 세뇌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현상이라 하겠다.

유럽이나 미국에 태어난 사람은 자연히 예수교인이 되는 것도 세뇌 현상이고,
중동 여러 나라에 태어나면 이슬람교도가 되고,
동남아에 태어나면 불교인이 되는 것도 두 말 필요 없이 세뇌 현상이다.

인도에 태어나면 힌두교도가 되고,
라틴 아메리카에 태어나면 캐톨린 신도가 되는 것은 자연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보수(保守) 성향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을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해서 좋은 값을 쳐 주는 사람이 많다.

참고;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앎. 논어의 <위정편>에 있는 말이다.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것(옛것)을 지키려는 고집이 숨어 있기도 하다.

이 온고지신도 사실은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서 쌓인 질긴 세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늙은 사람에게는 고집불통으로 보일만큼 보수성이 강하고, 젊은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진보 성향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세뇌의 기간과 반비례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보수 성향의 사람이 진보(進步) 성향의 사람으로 바뀌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수성향>을 <고정관념>으로 대치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불교 용어로, <보수성향>이나 <고정관념>을 <습(習)>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보수적인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으로 바뀌기도 어렵고,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도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6,70 대 부모가 3,40 대 자식이 못나(모자라) 보여서, 자기 주장으로 자식을 이겨 보려고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인생에서 3,40 대가 얼마나 성숙되고도 왕성한 때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6,70 대 또는 7,80 대 부모들이 이 3,40 대들을 그것도 자기 자식들을 이겨 보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그 구체적인 예들을 나열하기는 삼가기로 한다.

그러나, 나이 먹은 사람들은 자기가 고집을 피우며 주장하는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에 세뇌되어 쌓인 <고정관념> 내지는 <고약한 인습>은 아닌지 곰곰히 따져 봐야 될 것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몸과 마음이 모두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넉넉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여담]

젊은 시절의 남자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겠지만, 여자인 <비너스상>만 멋있게 보였을 뿐, 남성적인 <석굴암의 불상>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40 살이 넘은 어느 때부터인가 <비너스상> 따위는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게 되고, <석굴암의 불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42 살 되던 해 겨울(12 월) 어느 날, 경주의 석굴암을 구경하게 되었었는데, 그날 필자는 오랜 시간 동안 석굴암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유리 벽 바깥에서 추위에 떨며.

<미륵 반가사유상>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감미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40 살이 훨씬 넘어서였다.
지금도 <미륵 반가사유상>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저런 미소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욕심을 부려 볼 때가 많다.

오랜 세월 동안, 북한과 미국을 말할 때는 <미북>이라 했고, 북한과 중국이나 일본을 말할 때도 <중북> <일북>이라고 지칭되었었다.
어려서부터 북한을 <빨갱이>라 하여 무슨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교육을 받기도 했고, 마침내 그것에 푹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북미> <북일> <북중>이라고 말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동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리라.
이런 안목이 생겨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이 필요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100 % 맞는 내용인 줄 알고 있었다.
아니, 100 %는 아니더라도 90 % 이상은 맞는 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나, 역사라는 것도 승자(勝者)의 입맛에 맞도록 변질되고 각색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어떤 역사라도 50 % 이상은 접어 놓고 음미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자세는 현재의 언론 기관들이 전하는 내용들도 절반 이상을 깎아 내린 다음 곰곰이 따져 보는 습성이 생겼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서양식 문물에 젖어서 그랬던가, 예수교만이 정당한 종교로 보일 뿐, 불교 따위는 미신 내지 무식한 사람들이나 가지는 사탄의 무리쯤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불교의 <방편 설> <불입 문자> 등등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불교는 고등 종교, 예수교는 하등 종교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사실이던 거짓이던 예수교는 며칠만 파고 들어가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막다른 절벽에 걸리지만, 불교는 수 십 년을 파고 들어도 그 끝을 만나기가 힘들 정도로 깊은 맛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미신으로 취급되던 우리 나라의 무속 신앙이 대단히 심오한 종교라는 것을 알게도 되었다.
이 외에도 필자의 안목이 달라진 분야는 많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1980 연대 초, 나이 40 이 훨씬 넘어서 겨우 얻어진 안목이었다.

그렇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굳어진 서양식 굴레와 어려서부터 주위로부터 세뇌되고 염색된 틀을 벗어나서 세상을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많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고정 관념을 깨고 새롭게 태어난 모습>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제삼자 2012-10-02 (화) 12:49

<마음>

1981 년, 내 나이 서른 아홉 살 되던 해, 나는 남편과 두 딸과 아들, 이렇게 다섯 식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해서 한 달 쯤 놀다가 봉제 공장에 취직하여 다니게 되었다. 재봉틀이라고는 만져 본 적도 없는 나는 자투리 헝겊 쪼가리에다 왔다갔다 비뚤비뚤 박음질 연습만 하루 종일 하다가 집에 오곤했다. 그러다가 첫주 금요일이 되어 시간당 최저 기본 임금을 쳐서 40 시간 일한 주급을 받았다. 그 때, 나는 기쁘기도 하고, 회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손해만 입히고 돈을 받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과 신기한 생각이 들었었다. 한 편으로는 "미국이 좋기는 좋구나!"했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얼마 동안 time work(시간제 작업)를 하다가 어느 정도 숙달되고 나서는 piece work(성과급 작업)를 하게 되었다. piece work를 하게 되면, 서로 경쟁을 하게 되고, 가끔은 싸우는 일도 생기고,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나와 똑 같은 일을 여러 명이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배씨 성을 가진 38 세, 40 세 되는 미혼의 두 자매가 있었다. 이들 자매는 어찌나 일 욕심이 많은지 남들과는 물론 자기 자매끼리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살벌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말들은 하지 않지만 그들 자매의 성품에 대하여 느끼는 마음들은 모두가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들 자매가 즐겨 쓰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직원들 간에 크고 작은 모임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백일, 돌, 결혼 등등...그 때 마다 초대 받은 직원들은 부조금이나 선물을 하게 된다. 이럴 때,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들을 선물이라고 내놓고는 그 자매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성과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들의 선물 속에는 정성은커녕 언제나 그 자매들의 인색한 속 마음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후, 미국 생활이 한참 안정되었을 때, 나는 한국으로 몇 차례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여행 중에 한 번은 어찌어찌하여 군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끄는 강남의 어느 포교당의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전혀 아는 바 없이 불교를 마음 속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교회의 주일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알지도 못하는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따라서, 그 날이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불교와 만나는 날이었다.
그 날, 법회가 끝나고 군법사(군종감)와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식당엘 가게 되었는데,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군법사가 커다란 소리로 주인을 향하여 짖궃게 말했다.
"오늘, 왜 법회에 안 나왔어?"
그러자, 주인 쪽에서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식당이 너무 바빠서 못 나갔습니다. 그러나,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법당에 가 있었습니다."
그 때, 군법사 왈, "우리는 마음은 필요 없어. 몸뚱이가 필요하지."
나는 그 순간, 마음이 중요하다던 미국의 배씨 자매를 떠 올리며, 군법사의 말이 어찌나 명쾌하게 마음에 와 닿았는지 모른다. 그 뿐만 아니라, 식사하는 동안 내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제까지의 불교에 대한 나의 편견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 때까지 나는 불교를 미신으로 취급했었고, 스님이나 군법사는 염세주의자여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부류라고 생각되어 가까이 접근하기 싫은 사람들로 여겨 왔었다. 그러나, 불교도 아주 아주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사람들의 삶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홀딱 반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한 쪽이 꽉 닫혀 있던 나의 마음이 열리게 되었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는 행운을 얻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만약, 그 날의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 나의 마음은 얼마나 편협되어 있을까?
군법사와의 인연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보리밥 신세가 부러운 성종 임금]

조선 왕조 제 9 대 임금 성종은 미행(尾行)을 자주 나갔다고 한다.
미행이란 임금이나 고관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주변을 몰래 살피며 민정을 시찰하던 일을 말한다.

미행은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고 있는 북촌보다는 가난한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남촌으로 발길이 돌려지게 마련이었다.
그 날도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성종은 미복을 입고 소위 남촌의 달동네로 들어섰다.
미복(微服) 역시 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초라하게 옷을 입음을 뜻한다.

조선 시대, 가난한 서민들의 집이란 것은 대개 방 1 개에 부엌이 1 개 딸린 것이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마침내, 성종은 달랑 방 1 개와 부엌 1 개만 있는 어느 민가 앞에서 발을 멈추게 되었다.
손바닥 2 개 만한 조그만 봉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봉창 안에서는 도란도란 사람 소리가 들렸다.
성종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조심 조심 봉창에 작은 구멍을 만들고 들여다 보게 되었다.
옆에는 그으름이 시커멓게 피어 오르는 호롱불이 타고 있고, 젊은 부부가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말이 밥상이지 여기 저기 깨지고 흠집 투성이의 꿰짝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었다.
남편 앞의 밥 그릇에는 보리밥이 그런대로 수북하게 보였으나, 아내의 밥 그릇에는 밑에 깔려서 밥알이 보이지도 않았다.
반찬은 된장 찌게 비슷한 것이 한 종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여보! 배 고프지요? 어서 잡수세요."
"아니, 당신 밥 그릇에는 왜 밥이 없소?"

"걱정 마세요. 저는 조금 전에 찬 밥을 먼저 먹었어요."
"이러지 맙시다. 우리 똑 같이 나누어 먹읍시다..."

젊은 부부는 서로 실랑이 하느라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밥 한 사발과 된장 찌게 한 종지가 없어지는데는 한 시간 이상의 양보와 실랑이가 벌어지는 듯했다.
서민 부부가 벌이는 사랑 놀이를 봉창 구멍으로 훔쳐 보던 임금 성종은 샘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온갖 체통과 인습과 각종 굴레로 얽어 매인 왕으로서는 도저히 가져 볼 수 없는 감미로운 그림의 떡이었다.

호롱불이 꺼져서야 봉창가에서 물러서게 된 성종은 다리가 굳어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깜깜한 밤길에 대궐로 돌아 오면서 성종은 혼자 중얼 거렸다.
"아! 나도 임금이 아닌 서민으로 태어나서 저 젊은이들 부부처럼 마냥 자유롭게 살고 싶구나!"

대궐로 돌아 온 성종은 왕후를 마주하자 말했다.

"여보 왕후시여, 과인이 미행을 나갔다가 보리밥상을 마주한 젊은 부부의 사랑 놀이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오?
그러니, 내일은 왕후께서 직접 수랏간(부엌)으로 나가서 수라(음식)를 준비하고, 우리가 직접 겸상을 해보면 어떻겠소?"

왕명을 받은 다음 날, 나인들을 멀찍이 물린 뒤에 왕후는 직접 수랏간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곰을 잡는지 수랏간은 쾌쾌한 연기로 눈코를 뜰 수가 없었으며, 되는 일이 한 가지도 없었다.
결국, 왕명은 취소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성종은 대궐 밖이 아닌 대권 안에서 미행이 하고 싶어졌다.
성종은 몇 몇 내시들과 단단히 짜고서 변장을 했다. 어느 누구도 성종을 알아 볼 수 없도록 변장을 했다.
저녁 나절, 저녁 식사 조리가 한참 시작될 무렵, 왕은 수랏간에서 멀리 떨어져 엿보게 되었다.

한 나인이 삶은 달걀의 껍질을 벗겨 접시에 예쁘게 옮겨 담고 있었다.
그 때, 나인은 껍질 벗긴 달걀 한 개를 놓쳐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인은 땅에 떨어진 달걀을 얼른 집어 자기 입 속에다 넣었다.
그런 다음, 침으로 오물 모물 씻더니 손으로 꺼내어 다시 접시에 옮겨 담는 것이었다.

마침내, 산해진미의 수랏상이 준비되고, 그것이 성종(임금님) 앞에 놓였다.
임금님이 진어(음식을 먹다)하시는 동안은 음식을 준비한 사람이나 내시들이 주위에서 시립하고 서 있게 마련이다.

성종은 말했다. 누구라고 지목하지는 않고, 시립하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말을 했다.
"여기 있는 음식 중에 어느 것이 가장 맛이 있는 것이냐?"

왕의 뜻밖의 질문에 시립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조금 전 삶은 달걀을 입 속에 넣어 씻어냈던 나인이 대답을 했다.

"전하께서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직접 보셨다면, 진어하실만 한 것이 한 가지도 없고, 직접 보지 않으셨다면, 여기에 준비된 음식 중에 맛 없거나 귀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나인의 대답을 들은 성종은 큰 소리로
"네 말이 맞다."
하면서 가장 먼저 삶은 달걀부터 한 개 입에 넣고 어물어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제삼자 2012-10-31 (수) 19:09
[사기꾼의 말은 달콤하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천국의 상징)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신(神=여호와)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사야 52;7)


예수쟁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바이블 내용 중에서도 으뜸 가는 대단히 멋진 말이다.
장차, 구세주가 될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려고 나타날 것을 예언하는 말이라고 한다.

얼마나 희망찰 것 같고, 멋질 것 같고, 포근할 것 같고, 아름다울 것 같은 말인가!
그러나, 말(言)이 희망차다 하여 그 말의 실질적 알맹이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사기꾼의 말, 얼마나 매끄럽고 근사한가? 그러나, 그 결과는 삶을 파괴한다.


다 긁어 모아도 몇 가지에 지나지 않지만, 예수교는 바이블 속에서 근사하게 생긴 말들을 골라 내어 자랑하기를 즐긴다.
위의 바이블 구절도 그 한 가지 예이다.


그러나, 알맹이 없는 사기꾼의 말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인생을 망치는 치명적 올가미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래 위에 지은 누각은 나름대로 기초에 모래라도 있지만, 바이블이 말하는 허구(虛構) 속에는 기초는커녕 1~2 층 없는 3 층이라고나 할까?

금방이라도 천국과 만복(萬福)을 안겨 줄 것처럼 매끈한 말, 그러나 돈 빨아 먹고, 심신을 얽어 매는 굴레일 뿐이다.


멋지고 포근하고 희망적이고 아름다우면 뭘하는가?
모두가 사기꾼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공수표인 것을. 바이블은(예수교는).



[50 년이면 족한 것을 2,000 년 씩이나]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悔改)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태 4;17)

회개(悔改)-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국어 사전에서)
그렇다면,
회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사실은 無) 또는 태어나지 않을 사람(이것도 無)에게는 무관한 것임이 분명하다.


<회개하라>는 가르침은 현재 태어난 사람이 살다가 죽을 때까지면 족한 것이다.
예수 당시, 장수(長壽)하는 사람의 수명은 고작해야 40 세 전후였다고 한다,

40 세에 죽을 사람(甲)이 20 세 때, 사람이 해서는 안될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고 하자.
이 때, 예수가 나타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고 가르쳤다고 하자.
甲은 예수의 가르침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甲을 사랑하여 참고 기다렸다.
마침내, 19 년의 세월이 흘러 甲의 나이 39 세 되던 해에, 甲은 회개하여 예수쟁이가 되었다.
마침내, 예수가 참고 기다려 준 보람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1 년을 기다려서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5 년을 기다려서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40 년을 기다려서 회개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50 년을 기다리면,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없어진다.
더 기다려서는 안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의 죄를 회개시키려는 짓은 폭력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고 떠들 때,
예수(여호와)는 모든 여자들이 아이를 더 낳을 수 없도록 태(胎)를 막아 놓고, 50 년 정도만 기다리고 있으면 족했다.
여자의 태를 막지도 않고 2,000 년이 넘도록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무지 막지한 폭력이다.
왜냐 하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속에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
회개하고 천국에 갈 사람이 늘어날지는 모르겠으나, 회개하지 않고 지옥으로 갈 사람은 기하급수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수(여호와)가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神)이라 하여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아 죄(잘못)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사실은 無)까지 기다렸다가 천국 지옥을 논할 권한은 없을 것이다.
태어난 사람을 모두 천국으로 보내 준다면 모를까,
<회개>를 전제로 하는 천국이요 지옥이라면, 계속 사람이 새로 태어나게 하면서 마냥 세월을 기다린다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만행질이다.

예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반드시 50 년 시한부였어야 했다.
그것도 모든 여자의 태를 막아, 더는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행할 일이었다.
(여호와는 수시로 여자의 태를 막아 임신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여호와(예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1,000 년을 하루 같이 참고 기다리는 악마이다.
지난 수 천년 동안, 천국 갈 사람 몇 명을 확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옥 갈 사람은 수 백억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사랑이 많아 오래 참고 기다린다는 것인가? 아서라. 악마들아.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 계속 예수쟁이질이나 하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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